한때 ‘김치찌개’라는 예명으로 한방을 선사할까 싶었다는 노라 럼은 어디에나 있는 생수 브랜드(Aquafina)에 뭘 해도 어색한(awkward) 자신의 심정을 엮어 비로소 아콰피나(Awkwafina)가 되었다. 특정인들에게만 익숙할 매운맛 대신 모두에게 새로운 자신만의 조어법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아콰피나는 <오션스8>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으로 가능성을 보여주고, <페어웰>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으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그러나 누구와도 같지 않은 방식을 거쳐 할리우드의 새 아시아계 미국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라 럼이 15살 때부터 키운 또 다른 자아(alter ego) 아콰피나의 이름을 알린 계기는 2012년 출판사에 근무하던 그가 <나의 질>(My Vag)을 부르면서부터다. <페임>의 무대로 알려진 라구아디아예술고등학교에서 트럼펫을 불며 비트를 만들던 그는 한편의 랩 뮤직비디오로 히트를 치면서 직장 생활을 끝내고 다시 무대 위에 오르게 된다. 7살 때부터 수화기를 든 상대방이 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7살인지 70살인지” 몰랐을 정도였다는, 낮고 허스키한 아콰피나의 음색을 필요로 하는 곳은 힙합신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대표하는 작업물이 <나의 질>밖에 없던 시점에도 룰루 왕 감독은 그를 <페어웰>의 주인공 빌리로 낙점했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존 추 감독은 원작 소설의 펙 린을 아콰피나의 특색을 반영할 수 있는 캐릭터로 다듬었다.
“아콰피나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그 자신일 수 있도록 둬야 한다”는 존 추 감독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초기작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돌아봐야 한다. 다큐멘터리 <배드 랩>에서 “내가 인종이나 성별로 정의되지 않으며 오직 솔직함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다”며 정체성과 화제성의 간격을 탐색하는 뮤지션으로 현현했던 그는 <오션스8>의 각본가 올리비아 밀치가 연출한 넷플릭스 영화 <녀석들의 졸업백서>와 뒤이어 개봉한 <오션스8>에서 ‘퀸스에서 온 노라’가 가진 빛과 어둠을 자근히 드러낼 수 있는 역할을 맡았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모욕하는 식의 농담이 아닌 자기 욕망을 표출하는 ‘섹드립’을 일삼다 도서관에서는 학자금 대출 신청 자료를 뒤적이고(<녀석들의 졸업백서>), 야바위와 소매치기를 겸하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야무지게 재료를 추가해 먹는(<오션스8>) 캐릭터들은 여자들의 앙상블을 다채롭게 하는 기능에 충실한 한편 <나의 자지>(My Dick)를 뒤집는 가사로 세상에 나온 젊은 여성의 담대함을 유쾌하게 뽐낼 수 있는 매력을 지녔다.
그러나 쿨한 성격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 아이콘이 될 수는 없다. 이제 막 배우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아콰피나에게 아시아계로서의 대표성과 ‘재현의 힘’을 부여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페어웰>은 운명적 기회였다. 선명한 컨셉과 화려한 비주얼로 아콰피나의 매력을 마력으로 진화시킨 결정적 작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브로 한 저택에 살면서 친구에게 물질 세계의 생리를 가르치는 펙 린 역을 연기하며 부유하면서도 털털하고, 야단스러우면서도 속 깊은 아시안 갑부 캐릭터를 소화했다. 처음 발들인 동네의 황홀경과 위화감에 시들어가는 친구에게 어깨를 내주는 그의 입체적 면모를 보며 아콰피나를 키운 할머니는 “연기하는 것 같지 않다. 그냥 너 아니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통통 튀는 인물을 주로 표현한 아콰피나가 처음으로 웃음기를 제거한 <페어웰>은 아콰피나의 살짝 굽은 등과 뚱한 무표정을 지나 잊을 수 없는 억지웃음에 당도하며 미국과 중국 사이를 부유해온 영혼을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미국인이자 뉴요커로서, 처음엔 <페어웰>의 거짓말이 어딘가 잘못되지 않았나 골몰할 수밖에 없었으나 점차 아시아계 사람으로서 품게 되는 다층적이고 심오한 소통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아콰피나는 실제로 할머니와 오래 함께해온 삶과 대학 진학 전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중국에 갔던 경험을 꺼내가며 빌리를 연기했다고 한다.
2019년 <타임>이 선정한 ‘넥스트 100’ 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그저 존재함으로써 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내는 삶”을 살아왔음을 되새긴 아콰피나를 향해 샌드라 오는 그가 “남다른 자신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여러 정체성을 쥘 수 있는” 사람이라 칭했다. <페어웰>에 이르러 진지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이 어떤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지, 그로부터 어떤 감각을 통과해왔는지 이야기한 아콰피나는 이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모르던 뉴요커 시절의 자신을 담아낸 자전적 시트콤 <아콰피나 이즈 노라 프롬 퀸스>를 만들며 이야기를 변주해나가고 있다.
디즈니가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문화를 소재로 삼은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마블의 첫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 앤 더 레전드 오브 더 텐 링스>에 참여하며 아시안 콘텐츠의 확장에도 목소리를 더하는 중이다. 그 밖에 샌드라 오와 자매 사이로 분할 넷플릭스 코미디영화와 마허샬라 알리, 글렌 클로스와 애플TV의 SF <스완 송>을 준비하며 다양성과 상상력의 공존이 어떠한 독창성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보여줄 테다. 성큼성큼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와중에도 SNS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과 두려움을 고백하고, 그걸 드러냄으로써 다음 세대에 용기와 영감을 주고 싶다는 아콰피나를 보고 있자면 괜히 너스레를 떨고 싶어진다. 당신의 이름이 김치찌개였어도 반했을 거라고.
Filmography
영화 2021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2021 <브레이킹 뉴스 인 유바 카운티> 2020 <스폰지밥 무비: 핑핑이 구출 대작전> 2019 <쥬만지: 넥스트 레벨> 2019 <비트윈 투 펀스: 투어 스페셜> 2019 <앵그리 버드 무비2> 2019 <파라다이스 힐스> 2019 <페어웰> 2018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2018 <오션스8> 2018 <녀석들의 졸업백서> 2016 <아기배달부 스토크> 2016 <나쁜 이웃들2> 2016 <배드 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