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영화 '미나리' 첫 장편 <문유랑가보>로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정이삭 감독의 신작
2021-03-02
글 : 조현나

순자(윤여정)가 가져온 미나리 씨앗은 본래 자신의 터전인 양 미국 아칸소에 뿌리를 내린다. 푸른빛의 미나리는 순자에겐 삶의 지혜고, 모니카(한예리)에겐 엄마의 사랑이며, 데이빗(앨런 킴)에게는 가본 적 없는 한국의 정취다. 무엇보다도, 질긴 생명력을 지닌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온 제이콥(스티븐 연) 가족과 닮았다.

영화 <미나리>는 첫 장편 <문유랑가보>로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고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후보에 오른 정이삭 감독의 네 번째 장편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인 가족의 미국 생활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정이삭 감독은 “딸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만 남길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이어야 할까” 하는 고민 끝에 <미나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전한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노스탤지어에 젖어 있지 않은, 아름답고 보편적인”(봉준호) 영화 <미나리>가 해외영화제를 순회하고 마침내, 한국 관객 앞에 당도했다.

낯선 미국에서 병아리를 감별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제이콥과 모니카. 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아들 데이빗에게 아버지로서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제이콥은 아칸소로 이주해 자신의 농장을 가꾼다. 모니카는 낡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농장 일에만 몰두하는 제이콥이 못마땅하지만 그저 그의 결정을 지켜볼 뿐이다. 아칸소에서의 적적하고 고된 삶에 지친 모니카는 엄마 순자를 미국으로 모신다. 한약, 멸치, 미나리 씨 등을 잔뜩 챙겨온 순자는 여느 할머니와 달리 요리도 하지 않고 프로레슬링을 즐겨 본다. 앤과 데이빗은 그런 할머니가 낯설지만, 못된 장난까지 사랑으로 포용하는 할머니와 점점 가까워진다.

제이콥을 연기한 배우 스티븐 연은 <미나리>의 제작에도 크게 공헌했다. 스티븐 연에게 <미나리>는 “개인의 역사, 문화와 같은 섬세한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던 차에 만난 이야기”였다. 스티븐 연은 <옥자>를 작업한 제작사 플랜B에 <미나리>의 시나리오를 추천했고, 그렇게 <미나리>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이 겪은 이주민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한 영화다. 두드러지진 않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소외감이 영화 전반에 옅게 깔려 있다. 때문에 정이삭 감독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스티븐 연도 ‘나의 이야기’라며 제이콥과 데이빗의 경험에 공감한다. 이런 소외감의 굴레에서 인물들을 건져올리는 것은 바로 가족이란 존재다. 미국행 티켓이 자신들을 구원해주리라 믿은 제이콥과 모니카는, 기대만큼 녹록지 않은 미국의 삶에 지치고 관계도 소원해진다.

그런 와중에도 네 사람이 무너지지 않고, 제이콥이 농장이란 단꿈을 꿀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붙잡아주는 가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먼 타지로 달려와주는 사람, 무모한 꿈도 묵묵히 지켜봐주는 사람. 어쩌면 <미나리>가 말하는 구원은 대단한 성공이나 안정보다도 함께 주저앉아 울어주고,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가정이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그런 연유 때문 아닐까.

<미나리>가 형성한 공감대는 여러 영화제에서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배우 윤여정은 지난 2월 23일 발표된 밴쿠버비평가협회 여우조연상을 포함해 총 26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최근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윤여정을 오스카 여우조연상 예측 1위로 지목했다. 그 밖에도 <미나리>는 미국영화연구소(AFI)의 올해의 영화상 등 개봉 전부터 70여개 상을 수상하며 순항 중이다. 이 기세로 <미나리>가 <기생충>에 이어 아카데미에서 좋은 결과를 낼지 기대해봐도 좋겠다.

CHECK POINT

아역배우들의 빛나는 연기

두 아역배우를 제외하고선 <미나리>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데이빗 역의 앨런 김은 정이삭 감독이 “돌아가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유일한 아역”이었다. 오디션에서 솔직하고 꾸밈없는 자신을 내보인 앨런 김은 극중 가족의 막내로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노엘 케이트 조는 연극부 활동 이력을 가진 배우답게 속 깊은 앤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정이삭 감독은 “실제 남동생이 있는 노엘은 앨런과 금세 가족처럼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한집살이로 다져진 앙상블

촬영 기간 내내 같은 숙소에서 지낸 배우들은 가족처럼 모여 수다를 떨고, 영화에 관해 끊임없이 연구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이들의 합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선 시간의 결과물이다. <미나리>가 미들버그영화제에서 배우조합상인 앙상블상을 수상했을 때, 배우들은 “우리가 받아도 마땅한 상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불길에 휩싸인 그 장면

라클란 밀른 촬영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며 가장 스트레스를 받은 장면으로 화재 장면을 꼽았다. 불길이 얼마나 치솟을지, 어디로 튈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고 주어진 기회는 단 한번뿐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해당 장면을 모두 핸드헬드로 촬영하고, 남아 있는 모든 불빛에 의존해 장면을 찍었다”고 전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