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연우진)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지 못한다. 그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자기 이야기를 묵혀둔 사람들이 있다. 약속된 재회와 우연한 발견으로 각각 창석을 마주한 세 여자와 한 남자는 한 모금에 한마디씩 속사정을 풀어놓는다. 캐묻거나 반문하지 않는 창석의 태도가 이들의 입을 열고, 그들에게 자극받은 창석도 어딘가에 짐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배우 연우진은 “다시 무언가를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작가를 연기하기 위해 시나리오의 여백을 탐색했다. 넉넉한 대화 상대가 되기 위해 빈틈을 넓힌 그는 김종관 감독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고민을 반추해가며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창석은 미영(이지은), 유진(윤혜리), 성하(김상호), 주은(이주영)을 차례로 만난다. 실제 촬영 중 첫 대화 상대는 누구였나.
=영화의 순서대로 이지은 배우와 첫 촬영을 했다. 대본 리딩을 하면서 이지은 배우와 처음 만났는데, 리딩 때 임팩트가 강했다. 촬영 때에도 그가 가진 에너지를 잘 받아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여러 배우와 순간적으로 밀도 높은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기에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상대 배우 한명 한명이 영화의 색감을 하나하나 더해주지 않았나 싶다. 그들의 공이 너무나 크다.
-네 사람과의 만남에서 리액션이 주를 이루는 연기를 보여줬다. 창석은 빈말로 대꾸할 줄 모르되 쓴웃음으로 이를 대신한다.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 그렇게 누군가의 카운슬러가 되기도 하고 창작의 도움을 얻기도 하는 사람이 창석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게 드러난다. 대화 상대들 사이에도 창석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앎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 부분을 계산하며 연기하지는 않았다. 항상 순수한 상태로, 마음을 비우고 현장에 가려고 노력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으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갔고, 생생하게 받아치는 행동이 많이 나오길 바랐다. 그랬기 때문에 각각의 캐릭터들과의 관계성이 때로 아슬아슬하게, 재밌게 잘 표현된 것 같다. 결국 창석을 만든 건 상대 배우의 연기였다. (웃음)
-김종관 감독의 옆모습을 보고 창석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고.
=처음 캐릭터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알쏭달쏭했다. 시나리오에 담긴 여백을 어떻게 캐치해야 할까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감독님과 위스키를 한잔하게 됐는데, 바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옆을 바라보는 감독님의 얼굴이 주는 이미지가 내가 읽은 창석과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묘한 분위기가 나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영화에 담고자 한 이미지가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게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캐릭터를 잡아갔다.
-<더 테이블>에 이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내내 누군가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눴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 속에 인물을 두는 김종관 감독과의 협업이 어떤 의미를 가지나.
=내가 연기자로서 어떤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감독님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때마다 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배웠다. 나와 감독님 모두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함께 있을 때의 침묵과 고요 속에서 온정을 느끼고 마음을 정화했다. 작품을 할 때도 캐릭터를 더 진솔하게 준비하게 된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끌어내 캐릭터에 색을 입히려고 노력했다면 감독님과 작업할 때는 오히려 나를 돌아보며 비우게 되고, 그럼으로써 캐릭터와의 간극을 줄여나가게 된다.
-김종관 감독은 2019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연우진 배우가 “상대의 미세한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고 말하는 쪽의 맛을 최대로 살려준다”며 “강한 연기가 주를 이루는 한국영화의 남성 연기자 중에서 귀하고 감사한 재능”을 가졌다고 평한 바 있다.
=쑥스럽다. (웃음) 사실 어떤 연기를 지양하기보다 늘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연기를 할 때든 사회생활을 할 때든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좀더 맞춰가려는 것이 내 성격이다. 내가 준비한 걸 보여주고 싶고, 의견을 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거다. 그런데 내가 가진 성향과 연출자의 요구가 계속 맞아떨어지다보면 지루하기도 하더라. 나와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면 더 디테일하게 파고들어보고도 싶고, 더 강한 연기가 필요할 때는 나를 깨부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내 연기가 미술, 음악, 소품처럼 작품에 알맞게 쓰이길 바란다.
-드라마 <프리스트> <써치> 등의 장르물에서 보여주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픈 욕망과 작품에 잘 쓰이고 싶다는 바람을 실현했다. 장철수 감독의 <복무 하라>, 박대민 감독의 <특송>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JTBC 드라마 <언더커버>도 4월 방영을 앞두고 있다. 안 해본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쾌감이 있었을 것 같다.
=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기대를 했으나 촬영하는 순간만큼은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걸 이겨냈을 때의 쾌감이 있는 거지. 그런 자극들이 나를 더 움직이게 하는데, 어느덧 배우로 활동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연기를 잠시 쉬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전에 해왔던 장르와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새로운 시도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가진 그릇을 많이 깨부수면서, 더 넓은 그릇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며칠 전 <아무도 없는 곳>을 보며 상실, 늙음, 죽음을 대면하면서 분명한 위안을 얻었다. 이런 슬픔은 인생에 필연적이라고, 내가 순리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의 고민을 똑바로 마주봐야겠다고, 피하지 말아야겠다고, 삶도 연기도 그렇게 한번 해보자고 나를 다시 다독였다.
-곧 공개될 드라마 <언더커버>에서는 어떤 모습을 볼 수 있나.
=<연애 말고 결혼> <내성적인 보스>를 함께한 송현욱 감독님과 작업했고, 촬영은 다 끝난 상태다. 2인1역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지진희 선배님의 대학 시절을 연기했다. 액션이 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서 굉장히 활동적인 에너지로 작품에 임했다. 찍고나서 후유증이 있었을 정도다. (웃음) <아무도 없는 곳>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