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학교 가는 길' 이은자·정난모·조부용·장민희·김남연·김정인 감독 - 다름으로 차별받지 않기를
2021-05-05
글 : 이주현
사진 : 오계옥

#자기소개

김남연

김남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대표, 전국특수학교학부모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진학교를 비롯해 중랑구 동진학교, 서초구 나래학교 설립을 위해 뛰어다녔다. 2016년 서울시교육청 4박5일 점거농성 때는 교육청에 아이들을 데려다놓은 뒤 종로경찰서에 가서 “서울시교육청에 아이들을 유기했으니 우리를 잡아가라”고 자수했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경찰병력 50여명이 지키고 있는 서울시교육청을 새벽에 담 넘어 들어가 점거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부모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내 역할이었던 것 같다.

이은자 강서장애인부모회 1대 회장으로 미모 순으로 회장이 됐다(웃음). 서울장애인부모회 부대표로도 활동했고 지금은 성인기에 접어든 발달장애인들이 직업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강서퍼스트잡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정난모 이은자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을 지냈다. 내가 회장일 때 농성이 절정이었다. 회장이 되자마자 서울시교육청을 비롯해 각 구청 농성이 줄줄이 이어졌다. 우리의 홈그라운드인 강서구청 농성 때는 회원들 밥만큼은 제대로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에 푸짐하게 먹을 것을 준비하기도 했다.

조부용 강서장애인부모회 3대 회장을 하면서 서진학교가 개교하는 것도 보고 이 자리에도 함께하게 됐다. 나는 3대 회장이 되자마자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촉구 결의대회가 있어 삭발로 임기를 시작했다.

김남연 그때 삭발한 사람이 209명이었다. 한번에 209명이 삭발한 건 기록이라고 한다. 그날 200여명이 삭발했다고 보도자료를 냈더니 경찰 정보관이 전화해서 어떻게 200명이 삭발할 수 있냐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진짜 숫자를 얘기하라더라.

장민희 강서장애인부모회 1기와 2기 때 사무국장을 했고, 지금은 강서장애인가족지원센터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직 회장은 못 해봤고 나이로도 막내다. 사실 이분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는데 난 머리를 못 깎았다. 이들이 자주 하는 말씀이 “너는 회장 안 해봤잖아!” “너는 머리 안 깎았잖아!”이다. 대신 나는 (서진학교 설립 2차 주민토론회 때) 무릎을 꿇었다.

#영화와의 만남

조부용

정난모 2017년 9월 서진학교 설립 2차 주민토론회가 끝나고 김정인 감독과 처음 만났다. 쑥스러운 듯 자신의 프로필을 내밀면서 우리의 활동을 영상으로 담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당시는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우리를 관심 갖고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다. 그때부터 감독님이 우리를 3년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셨다.

장민희 역사에 남으려면 기록이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우리의 거의 모든 활동을 영상으로 남긴 김정인 감독에게 감사하다.

김남연 서진학교에 앞서 동대문발달장애인훈련센터 설립 투쟁을 했다. 그땐 주민들의 반대가 훨씬 심했다. 야간 토론회를 하는데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와 반대했을 정도다.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횃불이라니! 극악무도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내성이 생겨서 서진학교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때의 일은 하나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하루하루 싸우기 바빴다.

정난모 내성이라뇨! 우린 투린이였다고요, 투쟁의 어린이.

이은자 2차 주민토론회 이후엔 생전 연락 없던 사람들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반강제적으로 커밍아웃한 상태에서 감독님이 영화 얘기를 꺼냈을 땐 ‘어떻게 우리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싶었지 가족의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장민희 비장애 자녀들은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면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 싶었고, 그럴 각오도 있었다.

정난모 3년 전, 감독님은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하다.

김정인 감독 2차 토론회 당일에도 어머니들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성격이 소심해서 쭈뼛거리다 그날은 끝내 말을 못하고 돌아갔다. 토론회 현장에선 이 모든 게 굉장히 초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혐오의 발언을 쏟아낼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들은 조곤조곤, 또박또박 의견을 말씀하시더라. 멋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서 부모회에 연락을 드렸는데,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매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였는지 2~3주가 지나도 답이 없더라. 인연이 아닌가보다 싶었는데 나중에야 연락이 왔다.

장민희 당시 사무국장으로서 인터뷰 조율하고 일정 잡는 게 내 일이었는데, 그때 감독님이 대학원생이었다. 기자들 인터뷰 요청이 막 쏟아지는 상황에서 대학원생이라고 하니… 순서에서 좀 밀렸다. (웃음)

#투쟁의 시작

이은자

김남연 우리 아이 유치원 보낼 때 7곳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어릴 때부터 벽에 부딪히기 시작하는데 대체 앞으론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장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충격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특수학교라도 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갈 데가 없어 시설에 보낸다고 했다. 비인가 시설에선 약 먹다 죽고 맞아서 죽는 일도 있다고 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강남장애인부모회를 만들어 구청을 들락거렸다. 성인이 된 중증장애인들이 갈 수 있는 주간보호시설을 만들어달라고 3년을 서류 들고 정치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우리의 지극정성에 구의원 21명 중 20명이 찬성을 했다. 그런데 나머지 1명은 자신의 해당 지역에 보호시설이 들어서게 돼서 끝까지 반대했다. ‘내 지역에는 안된다’는 이유는 그때도 여전했다.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세상을 어떻게 살지 싶어 6박7일 구청 점거농성을 했다. 그때부터 투쟁이 일상이 됐다.

조부용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부모회를 조직하고 운동했던 김남연 대표가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개인적인 노력, 가족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서 아이가 다 자라고 난 뒤에야 부모회 활동을 시작했다. 투쟁해서 얻어내는 거란 생각을 못했다. ‘우리 아이 여기서 안 받아줘? 그럼 받아주는 데로 가야지’ 그랬다. 길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못했다. 내가 현정이의 엄마고 강서지역에 살았고 그 시기에 강서장애인부모회 회원이었고, 마침 서진학교 이슈가 있었기 때문에 투쟁에 참여하게 됐다. 부모회의 한 젊은 엄마가 내게 어떻게 힘들게 3년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60년을 살아오면서 그중 3년을 이 일에 못 바치겠냐고. 앞서 싸워온 엄마들에게 감사하고, 거기 힘을 보태고 함께할 수 있어 행운이라 생각한다.

정난모 더불어 강서장애인부모회의 조직력을 강하게 다져준 (강서구 지역 3선 국회의원) 김성태 전 의원에게도 감사하다. (웃음)

#나를 힘들게 한 것

정난모

김남연 동대문발달장애인훈련센터와 서진학교 설립 투쟁을 하면서 무서운 군중심리를 경험했다. ‘나는 장애인이 싫어’라고 개인은 말하기 어렵지만, 누군가가 그 말을 뱉고 나면 다같이 그 말을 부끄러움 없이 떠들게 된다. 그걸 목격할 때 소름 끼쳤다. 그때 평생 먹을 욕도 다 먹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심한 말들이 있는데, 그런 말을 들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한쪽 귀가 안 들려서 병원 치료를 받았다.

정난모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까지 우리한테 다 분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았다.

조부용 가장 벽으로 느꼈던 건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느낄 때였다. 발달장애인에 대해 우리가 잘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람들은 들으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느꼈을 때 상심이 컸다.

이은자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우리 딸 지현이가 없었다면 나도 편견을 갖고 세상을 살았을지 모른다. 우리가 발달장애 아이들을 키우니까 이런 차별을 아는 거지, 내가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들처럼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건 정말 어렵다.

김남연 처음엔 이 싸움이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앞이 안 보였다. 그럼에도 꼭 서진학교를 짓고 말겠다는 집념은 있었다. 다행히 2차 토론회의 무릎 사건으로 서진학교 이슈가 널리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는데, 1차 토론회 땐 언론사 세곳에서 취재를 왔던 걸로 기억한다. 1차 때 내가 강서구 주민이 아니라는 것을 문제 삼아 토론회가 열리지도 못한 채 파행으로 끝난 걸 기자들이 보고는 ‘이건 문제 있다’고 느꼈고, 그러면서 2차 토론회 때 더 많은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다.

이은자 언론의 힘, 언론의 역할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만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나이도 많이 먹어서 만날 투쟁할 수가 없다. <학교 가는 길>을 사람들이 많이 봐서 우리가 투쟁을 덜 해도 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영화가 꼭 히트해야 한다.

#삭발

이은자 2018년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요구하며 삭발 투쟁을 했다. 지금까지는 발달장애를 각 가정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 치부했다면 이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포하는 의미가 컸다. 발달장애인들이 살아감에 있어 국가가 마련하고 지원해야 할 제도나 인프라가 있는데 지금은 부족한 게 너무 많다. 부모가 나이 들고 늙으면 아이랑 같이 죽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어떻게 국가에 아이를 잘 맡길까를 고민하는 단계라 생각하고, 국가도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다.

장민희 여기서 유일하게 삭발을 안 했지만, 그날 가슴이 많이 아팠다. 같이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이은자 다음에 기회를 줄게. 당신이 첫 번째니까 머리 자르지 말고 기르고 있어. (웃음) 나는 머리를 두번 깎았다. 첫 번째는 2016년 서울시청 농성 때였는데, 남편이 퇴근하면 집에 와서 삭발한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곤 했다. 한달 정도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남편도 많이 속상했나보더라.

정난모 삭발하고 3개월 뒤에 아들이 군대를 갔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아들을 훈련소에서 배웅하는데 도저히 선글라스를 못 벗겠더라.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저 엄마는 아들 입대한다고 같이 머리 밀었나. (웃음)

조부용 미국에서 공부하는 딸한테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가 삭발하게 됐다고 전했다. 나중에 딸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엄마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자신도 최대한 짧게 쇼트커트를 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이런 게 가족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민희가 ‘자신은 삭발을 안 해서’라고 얘기하는데, 삭발은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의 부담이 크다는 걸 안다.

장민희 삭발하지 않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은자 그래서 이 영화가 성공해야 한다. <극장판 콩순이: 장난감나라 대모험>이 같은 날 개봉하는 경쟁작이라는데, 우리가 콩순이를 이겨야 한다.

#꿈꾸는 미래

장민희

이은자 우리 집엔 장애인이 한명이고 비장애인이 세명이다. 나는 장애가 있는 딸에게 “네가 장애인이라고 유세를 떠는 것이냐”라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비하하는 게 아니라 “너는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있는 그대로를 일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되면 굳이 통합교육이니 분리교육이니 하는 논의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고 숨겨야 하는 거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런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장애(인)를 접해야 한다. 그들이 낯선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이웃으로, 일상의 존재로 인식되었으면 한다. 있으면 있나보다 왔으면 왔나보다 하고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을 자연스럽게 봐주는 게 내가 바라는 현실적인 미래의 모습이다.

조부용 다름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사회, 우리가 참 많이 하는 말인데.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뭔가 할 수 없거나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정난모 그런데 우리 스스로도 ‘안돼’라고 말할 때가 많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 “~야, 조용히 해” 하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엘리베이터 타면 조용해 해야 돼요” 하고 소리내 따라 말한다. (웃음) 그저 사람들이 발달장애 친구들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싶다.

장민희 못하면 못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인정해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뛰어날 수 없지 않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함량 미달이라 폄하당할 때가 많은데 한국 사회가 더 너그러워지면 좋겠다.

이은자 그런 의미에서 김정인 감독님이 <학교 가는 길> 2편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간 발달장애 친구들의 이야기, <출근 하는 길>! 감독님,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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