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영화를 만들어온 이들의 목소리는 학술적으로만 접근했을 때 간과할 수 있는 지점을 보완하며 연구의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4월 13일 오후 8시(미국 현지시간)부터 열린 라운드 테이블에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 박은경 더램프 대표, 임순례·민규동 감독이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이날 창작자 입장에서 학회에 공유한 한국 영화산업의 현황을 이슈별로 정리해보았다.
-전세계에서 소구하는 한국영화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원동연 한국 영화산업이 발전한 것은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관객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에 투자자부터 배우까지 굉장히 많은 필터링을 거쳐야 한다. 지금 한국 영화시장에 예전의 스크린쿼터 같은 보호 장치가 없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한국영화의 퀄리티를 높였다. 필름메이커들이 관객과 직접 소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부터 더 절박해졌다. 감독들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쓰던 시절에도 경쟁력이 있었는데 지금 한국에선 일종의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웹툰, 웹소설 시장이 발달하면서 굉장히 우수한 원천 스토리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를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한국 테크놀로지도 상향 평준화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나라들이 꽤 긴장해야 할 것이다.
박은경 궁극적으로는 관객이다. 한국은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다. 때문에 콘텐츠에 대한 판단 기준이 까다롭다. 영화를 함부로 만들면 바로 소멸되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만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국 내에서 인정받는 작품들이 해외에서도 동일하게 인정받는 게 아닐까.
임순례 80년대 말, 소위 한국 사회에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문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했다. 90년대 초반 그들이 좇던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그 인재들이 영화계로 유입됐고, 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등 좋은 영화 학교들이 설립됐다. 결국 영화산업과 예술은 양면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한국영화계에는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처럼 자기 독창성을 유지하면서 대중적으로도 호응받는 유형의 감독들이 많다. 지금의 대기업 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 감독에게 많은 재량권이 주어진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산업과 예술을 절묘하게 매치시킬 수 있는 자원들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영화를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이 발전하고 장르나 서사를 적용하는 창의성을 갖고 있는 것도 영화계에 있어 굉장한 행운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가 굉장히 역동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를 담아내는 영화도 콘텐츠적으로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
민규동 내가 감독으로 데뷔한 해에 영화사 홈페이지가 처음 생겼다. 영화에 관한 욕이나 칭찬을 익명으로 편하게 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생기면서 놀라운 경험을 많이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에 폭격을 퍼부어 매장시키고, 다시는 이런 영화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저주하면서 본인의 지향을 밝혀나간다. 그렇게 관객이 영화계와 주체적인 상호작용을 맺으면서 영화를 변화시킨다. SNS 문화가 발달하면서 관객 각자의 파워는 더 강력해졌다. 관객은 오피니언 리더로서 영화에 영향을 끼치는 경험을 목도하면서 더욱더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제작자나 감독들도 이러한 집단 무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귀를 기울인다. 일반적으로 한국 감독들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이야기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한국영화는 한국 관객을 위해 만들어지는 관객 지향적인 작품이다. 그렇게 한국적 특성이 발현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도 특별하게 보여지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아시아 예술영화 감독들과의 차이점은, 한국에서 예술성과 상업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감독들은 장르영화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관객과 거리가 멀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는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
-최근 한국영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사랑받으면서 제작 현장에 생긴 변화가 있는가.
박은경 극장에서 개봉하는 콘텐츠와 OTT에서 공개되는 콘텐츠를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 극장 콘텐츠를 개발할 때는 전세계를 염두에 두고 개발하는 것 같지는 않다.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어떤 콘텐츠를 극장에서 더 보게 되는지를 고민한다. OTT 콘텐츠를 개발할 때는 보다 장르적으로, 혹은 보다 쉽고 단순하게 접근한다든지 하는 글로벌에 대한 고민을 어쩔 수 없이 한다. 결국 스토리의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토리에 완전 몰입하게 하고, 콘텐츠의 완성도가 높아지면 글로벌한 콘텐츠가 되는 것이 아닐까.
임순례 요즘 영상 콘텐츠 소비의 회전율이 너무 빠르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는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만드는 사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OTT보다는 극장용 영화에 더 무게를 두고 자극이 적은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나로서는 사람들이 짧고 가볍고 자극적인 것을 소비하는 경향이 강화돼서 고민이 많다.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 그 언어는 영화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해외 관객을 겨냥해 콘텐츠의 내용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지금까지 만들던 것을 더욱 세련되고 가성비 좋게 만든다면 글로벌한 관심도 따라올 것이다.
원동연 지금 창작 일을 하는 후배들에게 네가 생각하는 것을 기획하면 그게 세계적인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세계 10위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투영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제한이 없다.
민규동 한국은 육지로 다른 나라를 갈 수 없고, 한국어를 쓰는 아주 작은 나라다. DVD가 나온 지 20년이 지났고, 이제는 OTT로 영화를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막이 달린 영화를 본 것은 <기생충>이 처음이라는 미국 사람들도 있었는데, 앞으로 OTT는 자막 문화를 훨씬 더 용이하게 만들 것이다. 한국영화가 가진 한국어라는 핸디캡이 지금은 기술적인 도움이나 문화의 변화를 통해 바뀌어갈 것이다.
-기술의 변화는 한국영화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민규동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동영상 편집을 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일상적인 시대다. 한국은 기술을 통해 전체가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패셔너블한 라이프스타일이 있다. 영상 세대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영상으로 사고하는 방식도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도 거기에 반응해가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웹툰이나 웹소설도 마찬가지다.
원동연 팬데믹 이후 산업적인 측면과 콘텐츠적인 측면을 봐야 한다. 리얼라이즈픽쳐스는 2대 주주가 게임 회사다. 예전에는 영화와 드라마가 산업적으로 분리돼 있었는데 팬데믹 이후 급속도로 영화, 게임, 드라마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이합집산이 활발해질 것이다. 산업적인 기회는 훨씬 많아지고 이러한 챌린지를 잘 이겨내면 더 큰 자산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장쪽에서는 새로운 시각효과나 다양한 액션 등 아주 새롭고, 신선하고, 정서적인 보상을 주는 콘텐츠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조금 걱정스러운 것은 예술적이거나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 극장용 영화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임순례 내가 고민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얘기했다. 어쨌든 한국 영상산업에 종사하는 인력들은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전세계적으로 취향이 개인화되고 단절화되어가고 있는데, 결국 유튜브나 OTT에서 하는 콘텐츠는 세밀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극장에서는 사회적인 이슈라든지 작은 화면에서 볼 수 없는 기술적인 새로움이 있는 작품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적으로 아주 돋보이거나 극장 아니면 볼 수 없는 배우들을 캐스팅해야 하는데, 거대 자본이 투입되면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다가 제작이 무산될 수도 있다. 제작 과정이 단순화되고 압축되지 않으면 극장 영화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박은경 젊은 친구들을 보면 극장, OTT, 유튜브 콘텐츠를 전부 다르게 소비할 줄 안다. 유튜브를 많이 보는 사람이 극장 영화도 많이 본다. 코로나19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극장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오히려 예술영화가 극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라는 본질이 흔들릴 것 같지 않고,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