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인트로덕션>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올해 3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세 번째 은곰상(각본상)을 수상했을 때 <씨네21> 1296호에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본래라면 개봉을 앞두고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실어야 마땅하나 이번에는 아쉽게도 부득이한 이유로 <인트로덕션>에 대한 인터뷰를 싣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 위로를 해본다면, 사실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그리고 감독의 특질과도 연관이 있다. 최대한 의미를 곡해하는 것을 경계하다보니 짧은 답 또는 무의미해 보이는 답변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답변들이 궁금하다. 그것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또 다른 신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의 답변은 또 다른 형태의 창작물에 가깝다. 이후 비록 늦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홍상수 감독의 목소리를 전해드릴 것을 미리 약속드리며 이번에는 <인트로덕션>에 대한 짧은 서문 같은 감상을 먼저 전한다. 새로운 문 앞에서 망설이는 세상 모든 ‘지금’의 발견. 감독 홍상수는 당연하다는 듯 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 상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그렇게 찍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감독과의 인터뷰를 할 때 곤란한 상황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실제로 찍을 때 정황을 기억,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사후적으로 이유를 찾아내는 경우다. 이럴 때 답변은 설명이라기보다는 변명으로 덧붙여지곤 한다. 때문에 답변이 구체적이고 정확할수록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될 우려마저 있다.
다른 하나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다. 영화라는 덩어리를 말로 쪼개려고 해보았자 의미가 왜곡, 변형될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답변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홍상수 감독과의 인터뷰는 후자에 속한다. 그의 영화를 두고 짧은 시와 같은 압축된 표면 아래 잠긴 깊이, 여운, 신비함 따위의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상수의 장면들은 주어진 상황은 물론 시간에 대한 리액션의 총합이다. 단지 매일 아침 현장의 공간을 마주하고 영감을 받아 장면을 구축해나가는 독특한 작업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대개의 내러티브 영화가 이야기라는 목적지를 향해 형식이라는 길을 닦아나간다. 반면 홍상수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저 형태의 결과물이다. 우연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이 결과물은 재현 불가능하고 두번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홍상수 감독이 인터뷰에서 항상 밝히는 것처럼 그 장면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 것들, “(영화가) 원했거나 저절로 이루어진 장면들”이기도 하다.
추상적인가? 이번 영화 <인트로덕션>을 예로 들어보자. 1부에서 영호(신석호)는 한의사인 아버지를 만나러 한의원을 방문한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보면 문득 바깥에 눈이 내리고 영화는 마치 그 장면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인다. 여기서 눈이 내리는 장면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마침 촬영을 하던 어느 날 눈이 내렸을 것이고, 그 시간이 투명하게 찍혀 영화의 장면이 되었다. 눈이 없었더라도 1부는 가능했겠지만 마침 운명처럼 눈이 내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장면이 완성되었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 장면은 눈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눈 내리는 시간을 통해 전에 없던 신비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눈이 내리는 이미지’가 아니다. 눈 내리는 시간을 카메라가 어떻게 포착하여 영화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가, 그 과정의 신비다. 홍상수 영화에서 매 장면의 연결은 완전히 자유롭기에 동시에 완전히 정해져 있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한편의 영화 안에 포착된 이미지들은 다른 장면으로 대체 불가능하다. 다른 장면이 들어서는 순간 그 영화는 다른 영화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완전히 정해져 있는 장면이고, 그렇기에 완전히 자유롭다. 이 지난한 과정에 대한 설명을 축약하면 홍상수 감독이 스스로 밝히듯 “(영화가) 원했거나 저절로 이루어진 장면들”이 되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관객이 받아들이는 순간, 관객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완성되는 종류의 창작물이라고, 믿는다. 그전까진 이 신비로운 장면들의 의미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당신이 관측하는 순간에라야 비로소 성립하는 존재들. 따라서 이 글은 <인트로덕션>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필자의 위치에서 관측한 하나의 견해를 전달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영화의 발걸음을 그대로 되짚어 따라가는 응답들. 최근 몇년 동안 홍상수 영화들은 점점 투명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를 볼 때만 해도 말을 덧붙이고 의미를 지정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도망친 여자>(2019)는 비록 투명하지만 그 안에서 신비로운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다. <인트로덕션>에 이르면 마치 영화의 흑백 화면처럼 이런 의지들이 다 빛이 바랜다. 남는 건 그저 화면 한가운데 새겨진 세번의 포옹, 그 간절함이 전부다. 여기서는 그 세번의 포옹에 이르는 길을 짧게 언급해보려 한다.
*본 기사는 <'인트로덕션'② 세번의 포옹과 한번의 파도, 그리고…>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