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인트로덕션'① 세번의 포옹과 한번의 파도, 그리고…> 에서 이어집니다.
홍상수 감독의 <인트로덕션>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올해 3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세 번째 은곰상(각본상)을 수상했을 때 <씨네21> 1296호에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본래라면 개봉을 앞두고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실어야 마땅하나 이번에는 아쉽게도 부득이한 이유로 <인트로덕션>에 대한 인터뷰를 싣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 위로를 해본다면, 사실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그리고 감독의 특질과도 연관이 있다. 최대한 의미를 곡해하는 것을 경계하다보니 짧은 답 또는 무의미해 보이는 답변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답변들이 궁금하다. 그것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또 다른 신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의 답변은 또 다른 형태의 창작물에 가깝다. 이후 비록 늦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홍상수 감독의 목소리를 전해드릴 것을 미리 약속드리며 이번에는 <인트로덕션>에 대한 짧은 서문 같은 감상을 먼저 전한다. 새로운 문 앞에서 망설이는 세상 모든 ‘지금’의 발견. 감독 홍상수는 당연하다는 듯 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부
<인트로덕션>은 청년 영호의 궤적을 따라 세개의 챕터로 나뉜다. 1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영호가 아버지(김영호)를 만나러 간다. 연인인 주원(박미소)과 골목길에서 헤어진 영호는 한의원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중간에 잠깐 나와서 기다리라고 한 것을 카운트하지 않는다면) 만나기로 약속한 두 사람은 기어이 만나지 않는다. 아들이 기다리고, 아버지가 상황을 지연시키는 모습들만 차례로 늘어놓을 뿐이다.
한의원을 방문한 지인이자 배우(기주봉)가 한의원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포함하여 ‘기다림’이라는 상태 자체가 1부의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되는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또는 알 필요도 없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상태를 정확히 전달한다. 영화는 내내 이 간절한 상태를 붙잡고 가고, 인물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어떤 시간들을 버텨내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손님으로 방문한 배우 핑계를 대고 아들과의 만남을 미룬다. 기주봉 배우에게 침을 놓은 뒤 홀로 남겨놓고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이때 침을 맞은 채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기주봉 배우의 모습은 커튼 뒤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배우는 한의사를 찾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아마도 처음 진료받은 사람이 아닐까 싶은) 여자 환자가 화면 바깥에서 “안 계세요”라고 알려주는데, 오직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이 장면이 어떤 장면보다 이 챕터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여기서 우리는 부재하는 것들의 존재를 마주한다. 혹은 어떤 일방적인 기다림. <인트로덕션>은 시작의 지점 바로 앞, 문 앞에 선 존재들의 시간들을 그러모은 영화다. 인물들은 수시로 담배를 피우고 자리를 피하고 말을 삼킨다.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간의 침묵과 망설임이 때론 계속해서 피우는 담배로, 때론 술 한잔을 통해 반복되는 셈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1부에선 운명처럼 내리는 눈과 함께 작고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한다. 한의원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영호에게 간호사(예지원)가 다가와 말을 건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간단히 묻다가 문득 영호가 살포시 포옹을 하며 온기를 전한다. 잠시 뒤 간호사가 묻는다. “너 꼬맹이일 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사랑한다고 했어. 지금도 사랑해?” “네, 사랑하죠.” “다행이다.” 날리는 눈발을 함께 맞으며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자 간절한 안부의 전달이다. 이 포옹은 이후 3부에서 기주봉 배우의 일장 연설을 통해 직설적으로 전달된다.
인물들의 대사는 대부분 서사적 필연성보다는 떠도는 심정들의 파도에 가깝다. 때문에 언뜻 의미 없는 말들이 반복되고, 상대의 말을 복사하듯 다시 한번 되뇌는 것에 불과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1부와 3부, 시간을 건너뛰어 당도하는 배우의 일갈은 강렬하고 간절하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종종 얼굴과 상황을 달리한 감독의 대변자처럼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을 때가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가짜로 상대를 안는다는 게 힘들어서, 죄스러워서 배우를 포기했다는 영호에게 기주봉은 말한다. “그게 뭐가 죄스러워. 죄는 무슨 죄! 죄가 어디 있어? 사람이 사람을 안는데 그게 장난이면 어떻고, 그런 것 속에 무슨 놈의 죄가 있어. 장난으로 안아도, 가슴으로 안아도 다 사랑이야. 장난이건 연기건 가짜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건 다 사랑이야. 작게라도 좋은 거밖에 없어.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건데!” 착각해선 안되는 게 하나 있다. 이건 결론이 아니다. 정-반-합의 흐름도 아니다. 홍상수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그때그때의 심경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충돌하고 반발하면서 동시에 존재한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외롭기도 하고 따습기도 한. 이런 시간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영화의 마법이고 홍상수 영화의 투명성이다.
2부
2부는 의상디자인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난 주원의 걸음을 따라간다. 어머니와 함께 베를린에 머무는 주원은 어딘지 주눅 들어 보인다. 한참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머니, 그리고 함께 살게 된 어머니 지인의 기분을 수시로 살피던 그녀는 남자 친구 영호가 자신을 만나러 베를린까지 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만나러 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옹. 마주 보는 두 연인의 운명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이어지는지와는 무관하게. 영화의 어떤 구조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지도 잠시 내려놓고. 이 순간만큼은 예정된 이별의 시간을 가냘프게 버텨내고 있는 이 한장의 이미지로 족하다.
3부
솔직히 고백하자면 1, 2부는 편하고 느슨하게 관람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던 걸까. 쉼표, 소품, 미니멀리즘이란 단어가 영화 앞에 형용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 3부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는다. 심심하고 고요하게 일렁이던 감정의 파도들이 잔물결 밑으로 거대한 조류를 함께 몰고 오고 있었다는 것을.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지기 직전의 전조, 이 영화가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 영화 세계 전체의 ‘인트로덕션’이란 걸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에 이르러서야 새삼 실감한다.
홍상수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일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김민희)가 머물던 해변가, <도망친 여자>에서 감희(김민희)가 스크린 너머로 바라보던 바다가 무심한 듯 당연하게 연결된다. 이윽고 <인트로덕션>의 영호는 그 바다 한가운데로 풍덩 몸을 던진다. 이전 작품에선 대체로 파도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면 이번에는 몸으로 그 거친 물살을 헤집는 동작이 남달라 보인다. 남자는 왜 추운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왜 남자를 파도 한가운데로 밀어넣으셨나요. 답은 홍상수 감독의 머릿속이 아니라 스크린과 당신 사이에 존재한다. 어쩌면 그마저도 부질없는. 혹은 파도와 포옹하는, 추위에 떠는 영호를 안아주는 친구의 포옹으로 충분한.
대신이랄 건 없지만 다른 인상적인 장면에 대해선 뭔가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해변에서 영호가 주원을 다시 만나는 장면은 마치 꿈인 듯 신기하게 편집되어 있다. 우연인 듯 운명처럼 해변에서 만난, 헤어진 여자 친구의 사연을 한참 듣다가 갑자기 술 마시고 차 안에서 쉬다가 나오는 장면으로 점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호의 꿈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실은 상관없다. 이 장면으로 인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고쳐줄게”라는 남자의 대사가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다가올 수 있다면.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영호는 친구와 해변을 걷다가 문득 어머니가 머물고 있다는 호텔을 바라본다. 낮은 해상도 탓인지 어머니의 모습은 실루엣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인다. 신기하다.
<인트로덕션>에서 카메라는 내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내버려두었다. 아니, 커튼 뒤에 가려져 목소리만 나오는 기주봉 배우처럼 심지어 보이는 것들도 가려왔다. 홍상수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사람을 찍지,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직 이 한 장면만이 영호가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함께 바라본다. 심지어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쩌면 지금 카메라가 보여주고 싶은 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어머니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상태’일 것이다. 흐릿한 어머니의 모습이 문득 영호의 시선이 아니라 포도막염에 걸렸다는 주원의 시선과 겹쳐진다면 착각일까. 이 의도된 불투명함이야말로 <인트로덕션>을,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불투명한 진심을, 한없이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