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제작 중단을 선언했던 스튜디오 지브리가 6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발굴하고 스즈키 도시오가 제작을 맡았으며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한 <아야와 마녀>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새로운 도전이다. 스튜디오 지브리 최초의 3D CG애니메이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차라리 이 작품은 앞으로 지브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떻게 시대에 맞춰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 응답처럼 보인다. 과연 이번에도 지브리의 마법이 관객의 마음을 행복하게 적실 수 있을지, <씨네21>에서 단독 공개하는 마녀의 작업실 콘티 작화와 함께 미스터리한 아야의 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마법은 어떻게 쓰는 걸까.” 마녀와 함께 살게 된 소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묻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순정만화의 대명사 캔디라면 “꿈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이뤄진다”고 답했을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발견할 줄 아는 곰돌이 푸라면 “매일이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고 만족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씩씩함의 대명사 말괄량이 삐삐는 “쓰지 못해도 괜찮아. 마법을 쓰지 못하는 나도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든?”이라며 남들이 뭐라 하건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해줬으리라. 동화 속 주인공들의 명대사에는 삶의 태도와 방향이 농축되어 있다. 캔디는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고, 푸는 오늘 눈앞에 주어진 것들의 소중함을 지키고, 삐삐는 지나간 자신의 모습까지 긍정한다.
<아야와 마녀>의 미워할 수 없는 소녀 아야는 전혀 다른 해법을 내놓는다. “좋아, 이제부터 마법을 배워서 써먹어야지”라고 결심한 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살게 된 낯선 집, 자신을 마녀라고 밝힌 입양 부모 앞에서 소녀는 시키는 일을 할 테니 이제부터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방법을 찾는 영리함,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겠다는 정직함,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당당함까지. <아야와 마녀>의 주인공 아야 츠루는 세상의 기준에서 착하고 바른 소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감추고, 세상과 타협하며 얻어낸 착하다는 칭찬보다 사람들을 조종하겠다는 아야의 선언이 훨씬 매력적이고 미덥게 들리는 건 그저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시대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기꺼이 조종당하고 싶어질, 영리하고 당당한 소녀
<아야와 마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의 원작자였던 다이애나 윈 존스의 또 다른 동화 <이어위그와 마녀>를 각색한 애니메이션이다. 2014년 잠정 제작 중단을 발표했던 스튜디오 지브리가 6년의 침묵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미 예사롭지 않다. 원작 소설에 반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랜 동료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에게 제작을 해보자고 설득했지만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복귀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행 중인 상태였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고심 끝에 이 소중한 프로젝트의 연출자에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 감독을 추천한다.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지브리가 아닌 다른 스튜디오에서 <NHK>에 방영된 TV용 CG애니메이션 <산적의 딸 로냐>를 연출했는데, 이때의 경험을 살려 차기작도 CG애니메이션으로 구상 중이었다. <산적의 딸 로냐>는 CG로 제작되었지만 셀룩으로 표현된 작품이었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기왕 CG로 제작하는데 아예 전체를 3D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그리하여 지브리 최초의 풀 3D CG애니메이션이 탄생한다.
어느 날 고아들이 모인 ‘성 모어발트의 집’에 새로운 아이가 맡겨진다. ‘동료 마녀 12명을 완전히 따돌리면 아이를 찾으러 오겠다’는 수수께끼의 편지와 함께 맡겨진 아이, 아야 츠루(히라사와 코코로)는 구김살 하나 없는 말괄량이 소녀로 자란다. ‘사람을 조종한다’는 의미를 지닌 자신의 이름처럼 아야는 원장 선생부터 아이들까지 모두를 휘어잡으며 모어발트의 집에서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입양되기 싫어 매번 이상한 표정을 짓고, 때론 짓궂은 장난도 치지만 아야는 누구의 미움도 받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10살이 되던 날, 아야는 갑자기 찾아온 거구의 수상한 남자 맨드레이크(토요카와 에츠시)와 고약한 인상의 여자 벨라(테라지마 시노부)에게 선택되어 성 모어발트를 떠나게 된다.
수상쩍은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벨라는 정체를 드러낸다. 자신은 마녀이고 일손이 필요해서 데려온 거니 시키는 대로 일하라는 것. 놀랄 만한 폭탄선언에도 아야는 두려워하기는커녕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곧바로 벨라를 돕는 조건으로 마법을 배우기로 약속한다. 저택은 미스터리한 마법으로 가득해 탈출이 불가능하고, 작업실은 너무 더러워 청소할 거리가 잔뜩이다. 주문의 약을 받아서 판매하는 벨라는 아야에게 가사 전반을 떠넘기고 아야는 누구보다 열심히 허드렛일을 돕지만 벨라는 시간이 지나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 약이 오른 아야는 벨라를 골탕 먹일 궁리를 하며 과묵한 마법사 맨드레이크와 말하는 사역마 고양이 토마스를 조금씩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아야와 마녀>의 스토리는 소품에 가까울 정도로 간결하다. 원작에서도 마법의 저택에 갇힌 소녀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그런 만큼 기발한 사건이나 역동적인 전개, 대단한 메시지보다는 아기자기한 구성과 매력적인 캐릭터가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작품의 성패는 아야를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릴 수 있느냐인데, 가만히 보면 이 캐릭터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아야는 착하고 순수한 소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대놓고 사람들을 조종하겠다고 선언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심술쟁이처럼 보인다. 이 난감한 캐릭터를 어떻게 미워 보이지 않게 하는가, 그것이 <아야와 마녀>의 최대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야는 시대에 부합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캐릭터다. 약간 과장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 중인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한 박자 빠른 대답처럼 보일 정도다. 어른투성이인 세계에서 아이(새로운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야는 스스로 사람을 조종한다고 말하지만 그 방식이 교활하진 않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상대가 듣고 싶은 달콤한 말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야도 표면적으로는 정확히 그러한 작업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녀가 특별해지는 건 그다음이다. 아야의 태도에는 거짓이 없다. 상대에게 전하는 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아니 그게 진심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
마녀의 어질러진 작업실을 끈기 있게 치우는 아야는 그야말로 노력파라 할 만하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주위의 어른들을 조종하기 위해서 스스로 먼저 행동하는 아이. 열심히 노동하고 대가를 요구할 줄 아는 당당한 아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뒤돌아보지 않는 씩씩한 아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의도가 무엇이었건 이쯤 되면 상대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소통하는 쪽에 가깝다. 영화가 끝날 즈음 벨라와 맨드레이크로 대표되는 어른들처럼 어느새 아야에게 기꺼이 ‘조종’당하고 싶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응원하고 싶은 새 출발
물론 아쉬움도 있다. 지브리의 복귀작이라고 하기엔 소품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압축적이다. 재미있어지려 할 즈음에 끝난다고 할까. 지브리가 처음 시도하는 3D CG도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실사와 거의 구분하기 힘든 사실적인 CG 기술에 익숙해진 눈높이를 채우기엔 여러모로 모자란다. 이에 미야자키 고로 감독이 택한 돌파구는 디테일의 보강이 아니라 지브리다운 감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야와 마녀>의 3D 디자인은 마치 인형극을 재현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움직임은 종종 어색하고 디테일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대신 풍성한 표정과 만화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것이 머리카락 묘사인데, 머리카락 가닥 수로 구분되는 디테일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아예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점토와 같은 질감으로 표현하여 어색함을 상쇄시켰다.
디즈니·픽사의 최신작과 비교하면 아쉽지만 지브리의 첫 3D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무엇보다 작화감독 곤도 가쓰야가 맡은 캐릭터 디자인부터 색감, 세세한 연출까지 특유의 ‘지브리스러움’이 살아 있다. 그런 가운데 성장하지 않는 주인공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과는 또 다른, 어떤 측면에서는 거의 안티 지브리라고 해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주제와 참신함이 있다. 감탄하기엔 모자라지만 사랑하기엔 충분한, 응원하고 싶은 새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