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를 연출한 이미영 감독은 제작자로 오래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여고괴담> 시리즈를 만든 고 이춘연 대표의 영화사 씨네2000에 오래 몸담으면서 <여고괴담> 1편과 4편에 참여했고 <거북이 달린다>까지 제작한 뒤 독립해 영화사 거미를 차렸다. 이후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를 제작했고,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로 감독 데뷔했다.
<여고괴담> 3편이 개봉할 땐 출산으로 병원에 있었는데, 영화가 개봉하는 날 아이도 태어났다. 마치 <여고괴담> 시리즈가 이미영 감독의 어깨에 유령처럼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하자 그는 “하필 저의 데뷔작이 이춘연 사장님의 유작이 됐으니 더욱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미영 감독은 지난 5월 세상을 뜬 이춘연 대표의 얘기를 자주 꺼냈다. “<여고괴담> 시리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끝까지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를 믿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분”이라며 감사의 마음을 여러 번 전했다. 6편의 충격적 서사와 모호한 지점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인터뷰에 스포일러가 담기게 됐음을 미리 알린다.
-<비밀은 없다>를 제작한 이후 오랜만에 만든 영화가 감독 데뷔작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다.
=<비밀은 없다> 이후 다음 영화는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작가 구하기도 힘들고 연출자 구하기는 더 힘든 상황에서 마침 하고 싶은 아이템이 생겨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쓰다보니 연출에 대한 욕심이 자연스레 생겼다. 전에는 차마 용기를 못 냈다. 나이도 많아서 지금 연출을 시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케일이 큰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주변에서 진짜로 연출을 하고 싶다면 예산이 조금 작은 영화로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을 하더라. 그런 상황에서 이춘연 사장님과 식사를 하다 <여고괴담>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여고괴담> 6편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 시도는 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 그래도 5편 이후 10년 가까이 다음 작품이 나오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냐, 네가 한번 해봐라,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냐. 그런 얘기를 밥 먹으며 가볍게 나누고 돌아왔는데, 그날 밤 처음으로 ‘내가 <여고괴담>을 만든다면’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게 2018년의 일이다.
-그러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나.
=밤에 잠도 안 오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끄적여봤다. 생각보다 진도가 잘 나갔다. 전엔 무슨 얘기를 할까 하고 책상에 앉으면 한줄을 쓰기도 힘들었는데 이번엔 한달 반 만에 초고를 썼다. 한 여인의 트라우마, 모교로 부임해온 여자 선생님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포영화의 문법을 따르거나 <여고괴담>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춘연 사장님께 시나리오를 보여드렸더니 이야기 자체는 좋아하셨고, 다만 <여고괴담> 시리즈라면 갖춰야 할 요건들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여고에서 벌어질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같이 녹여내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 후 생각보다 투자 결정은 빨리 됐다. 외부에선 6편의 시나리오가 <여고괴담> 1편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1편에 대한 그리움이 제작 결정에 도움이 된 것 같다.
-2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여고괴담> 시리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새로운 공포,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고민이 컸을 것 같은데.
=이춘연 사장님은 <여고괴담>에서 중요한 건 무서움보다 슬픔이라고 얘기하셨다. 누군가의 한, 눈물, 상처, 억울함이 학교라는 배경에서 공포로 드러나는 거라고. 공포 이전에 슬픔을 텍스트에 담는 게 중요하다고.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 중요한 건 학교로 돌아가는 주인공 은희(김서형)의 사연이었다. 은희의 서사를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했고, 솔직히 새로운 공포에 대한 고민은 부차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새로운 시도라면, 학생이 아닌 선생님의 이야기가 중심이라는 것과 실화를 가져온 건데, 실재했던 역사를 가져온 건 나로서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언급했듯 6편에는 1편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있다. 1편과 6편 모두 모교로 부임한 선생님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선생님의 고교 시절 단짝 친구 이야기가 중요하게 그려진다. 처음부터 1편에 대한 오마주를 염두에 둔 건가.
=그런 건 아니다. 모교로 부임한 선생님의 이야기라는 점과 영화의 정서가 비슷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영화에 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여고생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였다. 영화엔 세 유형의 어른이 나온다. 학교 앞 슈퍼 할머니, 학교 경비 아저씨, 교장 선생님. 이들은 각각 상처받은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의 유형을 보여준다. 타인의 상처를 보고도 눈을 감는 유형, 적극적으로 타인을 도우려다 피해 입는 유형, 적극적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가해의 편에 서는 유형. 어른이 된 입장에서 아이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비록 ‘여고괴담’이지만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보다 어른들이 더 영화를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1986년에 대학에 들어가 처음 알게 된 광주의 실상은 내 머리를, 마음을, 사고를 통째로 뒤흔들어놓았다. 언젠가 5월의 광주 이야기는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러다 즐겨보는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5·18 계엄군에 성폭행당한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 순간 이 얘기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 나이로 보면 늦었지만, 감독으로 데뷔하자마자 광주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고맙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갈 거라 예상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은희를 연기한 김서형 배우의 나이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에 고등학생이었던 은희라고 하기엔 현재의 은희가 젊다.
=그 부분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처음엔 나이대에 맞게 좀더 연로한 분을 생각했는데, 어차피 광주라는 지역이 드러나지만 캐릭터들이 사투리를 쓴다거나 완전히 리얼 베이스로 가는 게 아니므로 차라리 물리적 나이를 자유롭게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 또한 가능하겠다 싶어 의견을 수용했다.
-은희가 광주의 모교로 돌아가는 건 과거와의 용기 있는 대면인 동시에 복수의 실행으로 이어진다.
=처음부터 한 여인의 복수를 생각하고 시작한 이야기였다. 어떤 분들은 한 여인의 복수와 현재의 학생들 이야기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엔 판타지적 장치가 필요했다. 실제로 어마어마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이 있고, 영화에서나마 보복과 복수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광주의 이야기가 오롯이 남길 바랐다. 하영(김현수)의 이야기를 은희의 이야기를 위해 들러리로 쓴 것은 절대 아니다. 상처 가득한 어른(은희)이 또 다른 아픔을 혼자 견디고 있는 소녀(하영)를 끌어안아주는 것도 중요했다. 하영을 비롯한 젊은 세대도 은희의 상처를 알아주길 바랐다.
-김서형 배우의 존재감이 강렬한데,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고백하자면 김서형이라는 배우를 조금 늦게 알았다. 드라마를 열심히 보는 편이 아니라서 그 유명한 <SKY 캐슬>도 뒤늦게 찾아봤다. 그전까진 세고 과장된 연기를 하는 탤런트 정도로 생각했는데, 김서형 배우의 영상들을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다행히 김서형 배우도 시나리오를 좋아해줬고, 첫 미팅 때부터 이건 운명적 만남이다, 나보고 이 영화를 하라고 점지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서형 배우와의 작업은 완벽했다. 눈빛이나 표정, 목소리 톤까지 너무 좋았다. 촬영하면서도 의지를 많이 했다. 김서형 배우가 없었으면 이걸 끝까지 붙들고 완성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김서형 배우의 영화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신인배우들을 캐스팅할 땐 어떤 점들을 중요하게 고려했나.
=예전 <여고괴담> 시리즈 때는 오디션 자체가 큰 마케팅이라 대대적으로 오디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6편은 은희의 이야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김서형 배우가 캐스팅된 이후엔 각각의 역할에 맞는 참신하고 연기 잘하는 신인배우들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고생 재연 역의 김형서 배우도 일찍 결정된 편이고, 하영이는 지금보다 더 불량한 느낌을 원했는데 뭘 해도 편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한 김현수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캐릭터의 느낌이 바뀌었다.
-과거 <여고괴담> 시리즈 오디션과 관련해 재밌는 일화도 많을 것 같은데.
=<여고괴담> 4편의 오디션을 꽤 크게 했다. 오디션에 참여한 배우들이 합숙까지 했는데, 오디션 선발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는 아니지만 오며 가며 본 김옥빈 배우는 처음부터 눈에 띄어 왠지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춘연 사장님한테 ‘될 사람 뻔히 보이는데 왜 합숙까지 하고 나중에 떨어뜨리느냐, 합숙까지 했다 떨어지면 상처받지 않겠냐’ 했더니 ‘그것도 하나의 추억이야’ 하셨던 기억이 난다.
-영화 일은 어떻게 처음 시작했나.
=광고회사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는 언니가 명보극장에서 기획실 직원을 뽑는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 인터뷰에 응했다가 뽑혔다. 명보극장에서 일하면서 <양들의 침묵> <포인트 브레이크> <집시의 시간> <연인> 같은 외화들을 보면서 조금씩 영화에 눈을 떴다. 이춘연 사장님과의 첫 만남도 명보극장에서였다. 이춘연 사장님이 <열일곱살의 쿠데타>라는 영화를 명보극장에 걸어달라고 찾아오셨을 때 처음 뵀다. 사장님 따라 <열일곱살의 쿠데타> 라디오 CM 녹음하는 데도 따라가고, 박찬욱 감독님의 <달은… 해가 꾸는 꿈> 같은 영화도 보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다 동아수출공사에 들어갔고, 이춘연 사장님이 성연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을 때 기획실 1호 직원이 됐다. 당시 회사에서 <손톱>을 첫 작품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손톱>이라는 제목과 ‘가질 수 없으면 파고든다’라는 카피를 내가 지었다.
-이춘연 대표와의 인연이 깊은데,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상심이 컸겠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이춘연 사장님은 직원들과 회식하면 본인이 직접 고기를 구워주셨다. 엊그저께 꿈에 사장님이 나와서 말없이 고기를 구워주셨다. 그 꿈 때문에 하루 종일 슬픔에 잠겼다. 코로나19로 영화 개봉이 한없이 늦어지면서 사장님이 힘들어하셨는데 그래도 최종 개봉 확정과 마케팅 회의까지 하고 떠나셨으니 어쩌면 본인 할 일은 다 한 거라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야 이렇게 가시면 어떡하나 원망스런 마음과 비통한 마음뿐이지만.
-<여고괴담> 시리즈가 6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장님이 7편도 준비하고 계셨다. 6편이 잘돼서 7편이 탄력받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잘 준비되면 좋겠고 사장님 바람대로 10편까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시리즈의 전통을 깨더라도 유명한 감독들이 <여고괴담> 시리즈를 연출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이춘연 사장님도 농담처럼 그런 말씀을 하셨다. 10편은 박찬욱 감독님이 연출하시라고. 박찬욱 감독님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웃음), 이른바 이름 있는 감독들의 힘을 빌리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앞으로는 제작자와 감독으로서의 길을 병행할 생각인가.
=연출을 하겠다, 제작을 하겠다 하고 나누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최선의 세팅을 하는 게 내 역할이고, 늦은 나이에 용기내 데뷔했으니 한편 정도 더 연출할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