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모큐멘터리(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대개 ‘신랄하거나 웃기는’ 성격을 띤다. <데이비드 홀츠만의 일기>(1967),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1984), <개를 문 사나이>(1992), <포가튼 실버>(1995), <거프만을 기다리며>(1996) 등을 기억해보라. 그러한 이미지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작품은 아마도 <블레어 윗치>(1999)일 것이다. 이후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카메라를 거칠게 흔들며 귀신 나오는 공간을 들락거리는 영화, 불시에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연 스타일의 영화로 인식하게 됐다.
이 장르는 딱 잘라 말해 시시해져버렸다. 요란한 소문을 몰고 온 <랑종>을 보면서도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건 이 영화의 전반부가 일부러 평범한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흉내낸다는 점이다. <곤지암>처럼 카메라의 흔들림을 면밀하게 계산해 촬영한다거나, 배우의 머리에 카메라를 부착한다는 설정 같은 건 아예 모른다는 듯이 군다. 그래서 한 20년 전에 비디오로 찍어놓은 영상을 끄집어낸 것처럼 보였고, 몇 차례에 걸쳐 미친 듯이 요동치는 카메라와 밋밋하게 구성한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는 얼핏 웃음이 나왔다. 이건 제작과 원작에 참여한 나홍진이나 연출을 맡은 반종 피산다나쿤이 앞서 찍은 영화들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지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감독이 아니던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모던함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2000년에 발표한 <정오의 낯선 물체>는 제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한해 전에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블레어 윗치>에 던지는 코멘트에 해당한다. <블레어 윗치>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세 인물이 숲을 헤매는 모습만 되풀이한다. 본격적으로 문제적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한참 후다. 그런 까닭에, 카메라를 들지 않은 인물이 카메라를 향해 “이런 장면을 왜 자꾸 찍냐”는 말은 변명으로 쓰인 대사에 다름 아니다. 충격적인 몇분의 순간을 위해 별 의미 없는, 다른 말로 하면 관객은 영화적이지 않은 수많은 장면을 보고 있어야 한다. 아류작이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실없는 장면이 반복을 거듭할 뿐이었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악령을 우연히 포착한 푸티지가 대체 어디서 그리 쏟아져나온단 말인가.
장르 팬이라 하더라도 방어하지 못할 난감한 상황을 <정오의 낯선 물체>는 일찌감치 예감한 것 같다. 연출이라는 역할 대신 ‘발상과 편집’ 역할로 참여했다고 우기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채집하는 과정 자체를 영화의 기둥으로 삼았다. 장애를 지닌 소년과 과외 선생의 우화는 정처 없이 흘러가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 호러 및 SF 장르와 뒤섞인다. 하지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그것을 따로 극으로 만들어 보여줄 마음이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든 아니면 모큐멘터리든 그는 굳이 가짜 귀신을 민망하게 제시하지 않고 빈손을 보여주는 게 더 정직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에필로그로 붙여둔 <정오에> 파트에서 대사를 제거한 일상의 이미지로 재깍 돌아선다.
만약 <정오의 낯선 물체>가 모던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에 언급한 괴상한 전개 방식 덕분이 아니다. 모던함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앞뒤 영화들을 연결하는 스타일에서 더 드러난다. 단편영화 <3세계>의 크레딧에는 <정오의 낯선 물체>의 푸티지를 삽입했다고 써 있다. <3세계>는 1997년에 제작돼 1999년에 발표된 작품이고, <정오의 낯선 물체>는 1998년 말에 촬영이 일단락된 작품이다. 시기적으로 이가 맞지 않거니와 나는 <3세계>에서 <정오의 낯선 물체>의 푸티지를 찾지 못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극중 선생이 아버지와 병원을 찾는 장면은 <징후와 세기>(2006)에서 재등장하고, 원래 <정오의 낯선 물체>의 후반부에 나와야 했을 장면–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와 인물이 마주하는– 은 난데없이 <열대병>(2004)의 후반부와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에서 장르로 슬며시 넘어가는 방식과 이야기의 소재에서 <랑종>이 <정오의 낯선 물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마구잡이로 연결할 경우 모든 태국영화는 호러로 끝난다, 는 우스꽝스러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건 아니지 않나.
반으로 꺾인 영화
20년 전으로 돌아가 만든 것 같은 <랑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 또한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다. <랑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의 주인공은 현재 무당인 님(싸와니 우툼마)이다. 이웃의 친근한 아주머니처럼 자기 직업에 임하던 그녀는 형부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상한 상황에 휘말린다. 첫 부분은, 님의 언니인 노이(씨라니 얀키띠칸)가 과거에 했던 계략을 들킬 즈음에서 끝난다. 두 번째 부분의 주인공은 노이의 딸인 밍(나릴야 군몽콘켓) 같지만, 실제 주인공은 잘못된 결혼의 비극을 깨닫지 못한 노이다. 님과 노이가 자매로 맺어져 있으나, 영화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은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라기보다 별개의 에피소드로 보는 게 더 논리적이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나는 <랑종>의 각본을 한 사람이 쓴 게 아닌, 두 사람이 따로 쓴 것을 연결했다고 여기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전자가 다큐멘터리의 외양을 갖춘 반면, 후자가 아예 장르영화에 집중하는 게 그러하고, 주인공의 역할을 고려해봐도 전자와 후자가 두개의 이야기로 분리되는 게 맞다. 주제와 인물을 대하는 자세도 전혀 다르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구실을 자막으로 표시하던 극중 제작진의 입장도 장르 부분으로 넘어가자 사라진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두 번째 부분을 먼저 본다고 가정해보라. 첫 번째 부분은 없어도 된다. 극중 인물이란 점에서 님은 두 번째 부분의 비극적 연쇄와 기실 어떤 연결점도 없다. 그렇다면 이건 잘못 이어진 영화 인가.
<정오의 낯선 물체> 전후에 등장한 예술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던 스타일로 ‘반으로 꺾인 영화’가 있다.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지만, 동떨어진 앞뒤 부분을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이어 붙인 영화들이 선보이던 때였다. 그 시기로 돌아간 양 행세하는 <랑종>도 엄격하게 말하면 그런 형식 아래 만들어진 작품이다. 나홍진과 반종 피산다나쿤 입장에서 흔하디흔한 호러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답습하는 건 쑥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큐를 찍다 보니 어느새 악령이 등장해 지옥의 풍경을 빚더라, 고 말해야 한다니.
반대로 정(正)과 반(反)을 만나게 하고, 야만적인 이음새를 에필로그로 봉합하는 <랑종>은 그러한 모양새로 여타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궤를 달리한다. 에필로그는 영화 전체를 다르게 읽게 하는 역할이면서 한편으로 영화의 첫 번째 부분을 거대한 맥거핀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필요 없는 부분이 아니라 (표면상 거의 드러나지 않는) ‘왜’라는 질문을 수행하면서 영화적 재미를 찾도록 만드는 역할이랄까. 그러므로 여기에 모던이라는 이름표는 어울리지 않는다. 장르를 만드는 두 인물이 자기들의 장르에 대고 취한 다른 태도의 결과물,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에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빈손은 어울리지 않는다. 뒤돌아섰을 때 무언가로 꽉 찬 두손을 보여주는 게 그들의 전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