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곡성>(2016)의 무속인 일광(황정민)의 전사를 다른 양식과 스타일의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랑종>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랑종>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장르적 외피와 태국이라는 시공간 등 영화의 뼈와 살을 다 발라내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나홍진의 정신(精神), 즉 세계관일 것이다.
<랑종>에서 시나리오 원안과 각본 그리고 제작을 맡은 나홍진 감독은 연출을 맡은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보다 자신의 존재감을 더 표출한다. 이 역전된 상황을 송경원 기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피산다나쿤 감독이 “나홍진에게 빙의”됐다고 할 수 있다.
악귀의 탄생 조건
나홍진의 세계관 확장 측면에서 <랑종>을 <곡성>의 프리퀄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랑종>의 배경인 태국 이산 지역에서 악마의 씨가 잉태되어 한국의 곡성으로 악이 흘러왔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우선 <랑종>의 님(싸와니 우툼마)이 <곡성>의 일광의 전사에 해당할까? 직업상의 일치 빼곤 둘은 성별도 국적도 다른 개별적인 인간이다. 둘이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님이 일광의 전사가 될 수 있을까? 이 세계관에서 인물간의 싱크로율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몸에 흐르는 귀신의 존재다. 따라서 <랑종>은 곡성을 물들인 악귀의 전사이며 악귀의 탄생을 그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랑종>은 <곡성>과 귀신에 대한 개념을 달리하며 시작한다. 우선 <곡성>부터 알아보자. 영화는 누가복음 24장의 일부를 발췌한 문구로 시작한다. 이 장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어떻게 믿을 것인지 묻고 있다. <곡성>은 예수를 악마로 치환하여 전개한다. 표면적으로는 무명(천우희)이 선한 신, 외지인(구니무라 준)을 그에 대립하는 악으로 나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연출자로서 나홍진은 명쾌한 해석보다 이러한 선택과 구분이 불가하게 뒤섞여 있는 상태 자체에 집중한다. <곡성>은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선택과 해석의 문제보다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이 팽배한 세계를 재현하고자 욕망하는 영화다.
<곡성>에서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 판단 근거로 누가복음 24장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세상에 존재함은 보는 이와 같이 뼈와 살이 있는 것과 만져서 느껴지는 촉감에 의존한다. 그것이 영(靈, Ghost)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은 귀신으로 서구적, 기독교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동양철학에서 귀신(鬼神)은 고스트(Ghost)가 아니다. 귀신은 일련의 순환 시스템을 의미한다. 도올 김용옥의 저서 <중용 인간의 맛>의 제16장 ‘귀신장’의 해석을 참고하자면 귀(鬼)는 돌아갈 귀(歸)로 흙에 해당하고, 신(神)은 펼칠 신(伸)으로 하늘에 해당한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 하늘과 땅의 묘합으로 존재하다가 죽었을 때 하늘과 땅으로 흩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원리에 따르면 우주에는 사실 귀신이 아닌 것이 없다.
<랑종>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무당 님은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이산 지역 사람들은 숲, 산, 나무, 논밭 등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님의 설명은 <곡성>에서 보여준 초월적 존재로서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기독교적인 이분법에서 탈피하고 좀더 확장된 형태의 동양적인 귀신을 다룰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오프닝 시퀀스 이후 전개되는 영화는 이러한 여지가 애초에 없었다는 듯 선과 악의 대결로 몰고 간다.
<곡성>과 다른 점이라면 <랑종>에는 선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곡성>에서 무명은 선을 형상화한 신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존재로 등장한다. 종구(곽도원)는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는 무명의 손을 잡고도 외면한다. 무명이 3번 닭이 울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종구는 집으로 향한다. 그가 집에 들어가면서 무명이 문에 걸어놓은 꽃은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맞이한 파국의 현장. 이렇듯 종구라는 캐릭터는 ‘불신’을 몸소 보여주며 최후를 맞이한다.
<랑종>에서 선에 해당하는 것은 님이 모시는 바얀 신이다. 바얀 신의 힘을 빌려 님은 마을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며 좋은 일을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님이 퇴마 의식 전한 인터뷰를 보면 그는 자신의 직업과 신마저 부정한다. 님 역시 그가 무시했던 가짜 무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얀 신은 어쩌면 대물림되는 신으로서 존재했다기보다 가문을 짓누르는 극도의 ‘불안’에 좀더 가깝다. 그 불안감에 일어난 증상을 신병으로 여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바얀 신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어떤 환상에 가까운 허깨비는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볼 수도 없는 신의 존재보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산속에 모셔둔 석상을 믿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른 가능성은 바로 밍(나릴야 군몽콘켓)이다. 악귀에 빙의된 밍에게 님이 누구냐고 묻자 밍은 처음엔 자신이 바얀 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라는 님의 설명이 영화의 마지막에 밍에게 빙의된 악귀의 탄생 조건이기 때문이다.
<랑종>의 님을 <곡성>의 인물들과 비교하면
<랑종>도 결국 절대적 악을 만드는 쪽으로 나아간다. <랑종>에서 밍에게 최후로 빙의된 악귀는 공장에서 죽어간 원귀들의 혼합체다. 이것이 악의 탄생이자 이 가문의 최초의 신내림이다. 따라서 악귀에 충성하던 대리인으로서 일광의 전사는 밍에게 가깝다. 이에 맞서는 선에 해당하는 바얀 신은 과연 존재했을까? <곡성>에서는 누군가가 의심할 때 계속 피와 살을 만져보라며 물리적인 '촉감'을 믿음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랑종>은 흐르는 액체를 통해 신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 검은 액체가 그것이다. 완전히 빙의된 상태에서 밍의 손을 따서 물컵에 넣었을 때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고, 이후 밍은 검은 액체를 토한다.
비슷한 장면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치러지는 퇴마 의식을 하는 밍의 엄마가 있다. 머리를 가려 딸인 척 행세를 했지만 퇴마 의식을 치르면서 그녀가 배출하는 것은 피다. 다량의 피를 배출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밍의 엄마는 피가 뒤범벅된 얼굴로 마치 바얀 신에 영접한 듯이 행동한다. 그러다 밍이 그 현장에 도착하고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흔들린다. 빙의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딸을 걱정하는 엄마로 돌아간다. 그 순간 펼쳐지는 것은 <곡성>과 같은 파국이다.
같은 무당으로서 일광의 비교 대상으로 님을 바라볼 수 있겠지만 님은 종구에 가깝다. 종구가 모든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불신의 상태로 향한다면 님은 맹신 혹은 광신으로 향한다. <랑종>에서 신의 대물림은 애초에 없었고 바얀 신이라는 하나의 판타지를 지키려는 강력한 믿음과 불안감이 가문 대대로 대물림됐을 뿐이다. 나홍진 감독의 시나리오는 ‘믿음’이란 주제로 <곡성>에서 불신으로, <랑종> 에서 광신으로 향하며 양극단으로 스펙트럼을 넓혔다. 하지만 그의 세계관에 다시 살과 뼈를 붙여 완성된 <랑종>은 나홍진의 기획의 장점을 가리고 단점을 부각하는 형태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질문은 영화 자체의 질문보다는 나홍진 감독이 연출했다면 달랐을까,라는 가정과 아직도 그에게 건 희망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