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CF 스타에서 '킹덤: 아신전'의 안티히어로까지 - 4가지 키워드로 정의한 배우 전지현
2021-08-04
글 : 임수연
전지현이라는 멋진 신세계
사진제공 넷플릭스

전지현은 <킹덤: 아신전>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중 처음으로 안티히어로를 연기한다. 아신은 조선인에게 차별받으면서 그들의 밀정 노릇을 한다는 이유로 같은 여진족에게도 멸시받는 부락민, 즉 이 세계관의 최하위 계층에 속한다. 국적과 핏줄로 그 사람을 규정하는 조선의 유교와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는 조선인이든 여진족이든 모두 생사역으로 만들어 죽여버리겠다는 파괴 행위로 이어진다. 그런데 조선의 ‘조커’라고 비유할 수 있을 법한 이 캐릭터를 전지현이 연기한 점이 유별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1997년 패션 잡지 커버걸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24년 동안 전지현의 출연작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언젠가 아신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행보를 그려왔다. 그리고 그 궤적을 몇 가지 형용사로 정리하다 보면 전지현은 아주 옛날부터 자기다웠고 그 한결같음을 지금도 지켜내는 중이다. 충돌하면서 늘 도전하고,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며 자기 삶을 온전히 지켜내는 전지현에 대해서.

충돌하는 전지현

사진제공 넷플릭스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테크노댄스를 추고(삼성 윙고 광고), 전신에 핏되는 흰옷을 입고 골반을 흔들며 춤을 추던(삼성 마이젯 광고) 당시 전지현은 아직 10대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설 때는 또래 친구들과 스티커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그 나이대 소녀였지만 미디어는 앳된 베이비 페이스의 전지현이 섹시 댄스를 출 때의 괴리감에 환호했다. 전지현을 발굴한 정훈탁 당시 싸이더스 대표가 16살의 전지현에게서 발견했던 캐릭터 역시 <레옹>의 마틸다다.

또래보다 먼저 커버린 소녀는 어른이 됐고, 전지현의 20살은 아날로그적 호흡으로 감정을 쌓아가던 멜로영화 <시월애>로 시작됐다. 그렇게 청순가련 눈물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나 싶다가 만난 <엽기적인 그녀>는 전지현의 20대를 전혀 다른 길로 돌려놓는다. 술 먹고 모르는 사람 머리 위에 토사물을 쏟아내고 견우(차태현)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모습은 이상한 통쾌함을 선사했다.

전지현은 무해한 얼굴을 한 여자, 혹은 무해하기를 강요받는 여자들도 실컷 욕을 하고 사람을 골탕 먹이고 화가 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에 기분 좋은 균열을 냈다. 그래서 그는 파격적인 컨셉으로 화제를 모은 ‘2% 부족할 때’ 광고에서도 “여자에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사랑”이라고 읊조리는 여성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여성이 매력적이라는 점에 감응했다.

도전하는 전지현

<별에서 온 그대>

<엽기적인 그녀>와 <도둑들> 사이, 전지현의 11년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그가 배우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CF 모델에 머문 시기라는 평가다. 흥행 면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지현은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에 앞장서 도전하며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충무로 대부분의 시나리오가 그의 앞에 쏟아지던 시기를 지나 그가 1년 반 만에 선택한 영화는 <4인용 식탁>이었다. 여성감독이 연출한 스릴러영화, 점프 스케어 등의 호러 효과로 관객을 놀라게 하기보다 탄탄한 드라마로 IMF 금융 위기 이후 가족 해체를 그린 작품이다. 자꾸 혼령을 보는 증상에 시달리는 주부 연을 연기한 전지현은 주부들의 일상, 주부들의 스트레스와 질환, 무당 기질이 있는 여성들에 관해 자료를 조사하며 캐릭터에 신중히 접근했다.

이어 <데이지>는 해외 로케이션이 자리 잡지 않았던 시절 네덜란드에서 두달 동안 지내며 찍은 한중 합작영화였고, 글로벌 프로젝트 <블러드>를 위해 3개월간 LA와 중국을 오가며 홍콩 출신 무술감독으로부터 검술, 공중날기, 180도 회전 발차기 등 고난도의 액션 훈련을 받았다. 전지현이 교복을 입고 뱀파이어를 잡는 여고생으로 변신했던 <블러드>는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로저 이버트 평론가는 4점 만점에 3점을 주며 “전지현의 다음 작품도 찾아볼 것”이라고 언급했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송수정 PD는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착각하는 남자를 집중 취재하는, 즉 주인공의 조력자 캐릭터였다. 작품이 좋으면 다른 배우를 서포트하는 롤도 마다않는 태도는 사실 전지현 정도의 톱스타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때문에 전지현은 데뷔 때부터 몸담았던 소속사를 떠나 1인 기획사를 설립한 이후 <도둑들>과 <베를린>을 선택할 수 있었고, <암살> 촬영을 앞두고 “치장하지 않는 여자”라는 최동훈 감독의 캐릭터 설명에 기꺼이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자기 삶을 중요시하는 전지현

<푸른 바다의 전설>

16살에 데뷔했고 데뷔 초를 제외하면 작품 외 노출이 거의 없다. 소속사의 휴대전화 복제 사건으로 경찰이 수사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전지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매니지먼트의 혹독한 관리하에 스타로 길러진 배우라고 보는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전지현은 일과 일상을 구분하며 살아야 한다고, 인생에서 자신의 행복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배우다. 그래서 <엽기적인 그녀>를 마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 혼자 아파트에서 밥 짓고 빨래하고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고, 홀로서기 이후에는 더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지키고 있다. <도둑들> 개봉을 앞두고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식을 올리고, <암살> <푸른 바다의 전설> 이후 긴 공백기를 가지며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에 전념한 것은 흥행과 인기의 판도가 사생활에 영향을 줄 이유는 없다는 신념으로 보인다.

더불어 “나와 신랑은 집에서 유재석을 ‘유느님’이라고 부른다”라며 <무한도전>의 팬임을 자처한 그는 “너무 좋아하지만 출연하지는 않을 거다. 이상하게 <무한도전>에 스타가 나오면 재미가 없다”라는 비연예인 같은 마인드까지 갖고 있다. 이는 일하는 전지현의 방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스스로도 밝혔듯 일하는 전지현은 메소드 연기와 거리가 멀다.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슬픈 연기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날의 나의 상황을 슬프게 만들진 않는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배우가 배역의 감정에 푹 빠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난 편하고 자유로워야 집중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우리가 알던 전지현에다 일 외의 개인적 행복까지 놓치지 않는 톱스타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그의 브랜드와 커리어는 더욱 다채롭게 풍요로워지는 중이다.

주도권을 쥐는 전지현

<암살>

드라마 <해피투게더>를 시청했던 사람들은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베스킨라빈스에서 차태현에게 체리쥬빌레를 퍼주던 이병헌의 동생이 그냥 저 역할에 머무를 배우가 아니라고. 그는 이병헌, 김하늘, 송승헌, 손현주, 차태현 등 지금은 각자 주연을 맡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나왔던 이 드라마에서도 조연을 맡기에 너무 주인공 같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전지현이 <시월애>나 <엽기적인 그녀>에서 주인공이 됐을 땐 드디어 적소의 안정감을 찾았다.

요컨대 전지현은 웬만하면 시선을 뺏기지 않는 배우다. 이는 행동이 다소 수동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캐릭터를 맡았을 때도 유효하다. 화려한 멀티 캐스팅을 무기 삼은 캐릭터 플레이를 시도한 <도둑들>에서는 “어마어마한 썅X” 같은 캐릭터와 화려한 공중 액션으로 신을 가져갔다면, <베를린>에서 북한 첩보요원 표종성(하정우)의 아내로 나왔을 때는 낮은 목소리와 그늘진 표정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국 로맨스 드라마가 아직 재벌 2세에게 보호받는 여성을 그릴 때,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는 위기의 순간마다 외계인 도민준(김수현)의 도움을 받지만 진짜 서사의 주도권은 천송이에게 있었다. 연예인과 여성을 향한 세상의 시선을 집약한 천송이의 위기와 변화는 곧 <별에서 온 그대>의 내러티브가 됐다.

<암살>은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천만 영화 중 여성배우의 이름이 크레딧 첫 번째로 뜬 유일한 작품이다. <4인용 식탁>으로 인연을 맺은 안수현 케이퍼필름 대표에게 전지현이 먼저 전화를 걸어 관심을 보였다. 작품 안에서 그는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파를 동시에 암살하는 계획에서 대장 역할이다. “다들 여자가 대장이라 이상한가?”라는 대사로 영화의 대내외적 의미를 짚은 뒤,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암살>은 전지현에게 중심을 내준다.

<킹덤: 아신전>에 이르러 전지현은 시리즈의 세계관을 장악한다. 앞서 두개의 시즌을 통해 보았던 생사역의 참극이 사실 아신의 서늘한 복수심에서 시작됐다는 오리진 스토리는 대사 없이도 화면을 지배하는 전지현의 존재감 덕분에 단편 에피소드 이상의 잔상을 남긴다.

전지현의 충돌하는 이미지는 가장 밑바닥에서 잔혹한 살육전을 연 여성 안타고니스트 캐릭터로 가닿고, 극단적 파괴로 뻗는 주인공을 내세운 파격의 서사는 전지현의 도전정신과 궤를 같이하며, 배우에게 내재된 안정감은 아신 캐릭터의 적정온도를 맞춘다. 그리고 관객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야 마는 전지현은 <킹덤> 시리즈의 세계관을 계급과 순혈주의, 난민 소외의 영역까지 다층적으로 확장시키고, 보는 각도에 따라 우리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서늘한 질문까지 던진다. 태생적인 스타가 오랜 기간 자신을 단련하며 숙성해온 안온과 균열, 변주와 전복의 힘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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