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최선의 삶' 방민아, 두려움을 내려놓고
2021-09-01
글 : 남선우
사진 : 오계옥

무엇이 절박한지 모르는 채로 절박해서, 절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이의 최선은 별거 없다. 당장 갈증을 달랠 술을 마시고, 더위를 잊을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곁을 내준 누군가를 뒤쫓는 일. 배우 방민아가 연기한 고등학생 강이에겐 그런 선택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가 오면 땅 밖으로 나와 밟히는 지렁이처럼, 집이 답답해 가출한 강이는 친구들과의 서툰 관계에 몸을 맡기고 헤맨다. 내내 바닥을 꿈틀거리는 강이로 인해 배우 방민아도 감정의 흙을 수시로 골라야 했다. 그는 시시때때로 강이의 내면에 접속하기 위해 어린 날의 방민아를 파고들었다. 그가 발굴한 소녀가 우리와 눈 맞추기를 기다리고 있다.

-드라마 <이벤트를 확인하세요>가 방영 중이다. 헤어진 연인과 발랄한 소동을 겪는 송이는 <최선의 삶> 속 강이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재질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최선의 삶>은 10대 여자의 감정을 밀도 있게 담아내야 해서 디테일하게 생각했다면 <이벤트를 확인하세요>는 로맨틱 코미디라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고 했다.

-<최선의 삶>의 이우정 감독과의 첫 미팅은 기억하나. 감독을 만나고 나서 이 영화를 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던데.

=욕심은 너무 났는데 기존에 내가 해온 연기 스타일과 다른 지점이 많았다. 이해가 안되는 감정선도 있었고. 이런 고민을 감독님께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더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감독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이미 하고 계셨다. 특히 소영(한성민)과 강이가 처음으로 혼란을 겪는 ‘푸른 밤’ 신이 노골적이거나 소모적이지 않기를 막연히 바랐는데, 감독님이 먼저 그 부분을 오픈해서 말씀해주셨다. 그때 이우정 감독님을 믿게 됐다. 가슴이 뛰니까 도전해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우정 감독도 배우가 첫 미팅부터 “머리가 빠개지도록 고민하고 온 게 느껴졌다”고 하더라.

=강이라는 인물 자체에 집착하게 되더라. 인물의 디테일이 걷잡을 수 없이 가지치기하듯 뻗어나가는데 오히려 막혀버렸다. ‘나는 강이가 아니라 소영이구나’ 하면서 가지가 멈추는 거다. 그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내가 나를 좀 아는 편인데(웃음), 스스로 밑바닥을 찍어야 오히려 조금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끝까지 가야 한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꼭 한번은 바닥을 찍게 한다.

=맞다. 욕심이 많아서. 이렇게 좀 그만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막히는 순간 소영이 떠올랐을까.

=내가 원래는 강이였다. 타인이 정말 중요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주축이 없어서 타인에게 기대는 사람.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도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생각과 의견이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소영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이 괴로웠다. 강이에게 이입하면서 실수투성이였던 내 모습이 떠올라 힘들었다. 그럴 때면 감독님이 무한한 응원을 해주셨다. 어떻게든 보답해서 강이를 숨 쉬게 하고 싶더라.

-머리 양옆에 커튼을 친 것 같은 중단발머리에 몸의 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옷이 강이에게 숨을 불어넣는데, 방민아 배우에게서 한번도 보지 못한 스타일링이다.

=가수 생활을 오래 하면서 내게서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모습으로 남들 앞에 서야 했다. 최선이 아닌 최고의 모습. 촬영하면서는 껍데기를 벗은 기분이었다. 예뻐 보여야 한다는 두려움을 하나씩 내려놓은 것 같다. 가끔은 더는 내려놓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웃음)

-강이는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노력한다. 강이가 일말의 노력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혼이 없어 보이는 순간은 부모와 있을 때다.

=그게 내게도 의문이었다. 강이 부모님은 가출하고 돌아온 애한테 꽃도 주고, 밥에 반찬도 얹어주는데, 강이는 왜 이렇게까지 부모한테 마음을 못 주나. 나중에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따뜻한 이불이 포근하고 좋아서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라는 내레이션 대사를 좋아한다. 그 이불이 가족을 칭할 수도 있겠더라. 우리는 집이 편안해야 한다고 세뇌돼 있지 않나. 나갔다가 돌아는 오는데 막상 집에서 편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이유는 강이도 모른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부모라는 기준은 누가 정했으며, 그 기준에 미달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까. <최선의 삶>을 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평범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는 거다.

-그런 속마음을 내레이션으로 풀어낼 때는 몸을 쓰며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겠다.

=촬영을 마치고 1년 정도 흘러 녹음을 했다. 세 가지 버전을 준비했다. 극중 감정 그대로의 강이, 한 챕터를 끝내고 괜찮아진 강이, 괜찮지 않은 강이. 감독님과 충분한 대화를 거쳐 15년에서 17년이 흐른 후 조금은 괜찮아진 강이를 생각하면서 녹음했다.

-30대의 강이는 어떻던가.

=마음이 아파 상상하기 힘들다. 만나면 괜히 앉혀놓고 혼낼 것 같고. (웃음) 사실 강이가 많이 미웠다. 옛날 내 생각이 나서. 나는 죽도록 노력해서 바뀌었다. 아니 나를 바꿨다기보다 내 안을 넓혔다. 그러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길 강요하고 있더라. 이제 누군가에겐 변화의 순간이 느리게 온다는 걸, 누군가에겐 오지 않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저 강이의 평안을 바랄 뿐이다. 그 애가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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