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일했던 이준익 감독이 기억하는 서울극장
2021-09-01
글 : 배동미
사진 : 백종헌
시위대와 백골단이 극장에 들어와도 영화는 돌아갔다

1986년 28살의 이준익 감독은 봉급 30만원에 혹해서 서울극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15만원 받고 일했던 잡지 <주부생활> <여성자신> 일러스트레이터를 그만두고 그길로 약 2년간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영화 포스터는 물론 대형 간판, 작은 신문광고, 지하철역에서 나눠줄 지라시 광고까지 모두 디자인했다. 그가 처음 광고한 영화는 <변강쇠>였다. 영화에 대한 꿈이 없었던 청년 이준익은 서울극장과 인연을 맺으면서 영화를 시작했고, 오늘날 영화감독으로까지 성장했다. 1980년대 낭만이 가득한 서울극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그 기억을 조금 나눠달라고 청했다.

-단관극장 시절 서울극장에서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당시 서울극장 좌석 수가 1003석이었다. 그땐 단관극장 시절이기 때문에 좌석 수가 1천석이 넘느냐 안 넘느냐가 중요했다. 1천석은 굉장히 상징적인 숫자다. 서울극장 주변에 있었던 재개봉관 오스카극장, 금성극장, 성남극장, 화양극장의 좌석 수는 600~700석 수준이었다. 서울극장은 턱걸이로 1천석을 넘었다. 단성사가 1100여석, 피카디리극장이 1200석, 대한극장이 2천석에 가까운 1980여석, 명보극장도 1200~1300석이었다. 스카라극장이 아슬아슬하게 1천석쯤이다. 벌써 30년 전인데도 좌석 수를 다 외우고 있다. 당시 극장과 극장간에 얼마나 스코어가 오르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기 때문이다. 상대 극장의 좌석 수를 전부 외우고 있어야 했다.

-서울극장에서 일할 때 기억에 남은 풍경이 있다면.

=1986년부터 약 2년간 근무했는데 그때가 영화 <1987>의 배경 아닌가. 종로3가에서 매일같이 최루탄이 터졌다. 최루탄을 마신 시위대가 극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숨었고, 백골단이 시위대를 잡으려고 따라들어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 입장에선 느닷없이 시위대가 들어오고 백골단도 들어오니 정신이 없었다. 또 최루탄 가스까지 극장 안으로 들어와 관객이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영화를 봤다.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 돌아갔다. 좀 있으면 백골단이 시위대 몇명을 붙잡고 우르르 나가곤 했다. 그런 일이 일주일에 몇번씩 일어났다. 영화 <시네마 천국> 같은 일이다.

-서울극장에서 수많은 영화를 봤을 것 같다.

=지금 없는 진풍경이 시사실 문화다. 지금은 멀티플렉스 시대이기 때문에 개봉 전 시사회를 멀티플렉스에서 1개관을 빌려서 연다. 당시에는 단관이라 시사를 할 남는 스크린이 없었다. 극장 영업이 다 끝난 밤 12시에 1천석 극장에서 막 세관을 통관한 필름을 상영했다. 극장주 곽정환 회장, 수입업자 사장, 포스터를 만들어야 하는 나, 영화사 직원 1명 이렇게 넷이서 자막도 없이 영화를 봤다. 영화 상영이 새벽 1~2시쯤 끝나면 ‘이 영화를 개봉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개봉한다면 언제 할 것인가’, ‘상영기간은 1주냐, 2주냐, 3주냐’를 결정했다.

-직접 줄 서서 극장 입장권을 샀던 시대만의 낭만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그때 낭만이란 ‘줄 세우기’다. 종로3가 사거리에 4개의 지하철 출구가 있었다. 북서쪽 출구로 나오면 피카디리극장이 보이고, 북동쪽 출구는 단성사로 가는 길이고, 남서쪽은 서울극장으로 오는 출구다. 매주 토요일이면 신작이 개봉하니까 토요일 아침부터 지라시맨이 지하철 입구 계단에 서서 열심히 지라시를 돌린다. 그때 영화 관람 형태는 종로3가 사거리에 서서 극장 간판들을 둘러보고 영화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드시 어떤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관객의 마음은 뺏을 수 없고, 이 영화든 저 영화든 사람 많은 극장을 찾는 사람을 얼마나 뽑아내느냐가 극장간 경쟁이었다. 그러면 이제 줄 세우기가 시작된다. 매표소에서 표를 천천히 파는 거다. 처언천히. (웃음) 서울극장 표를 구하려는 사람이 종로3가 사거리를 지나 조흥은행을 지나고 떡볶이집까지 이어진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 종로3가를 지나가는 사람,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그 행렬을 보고 ‘서울극장에 엄청 많이 줄 서 있네. 저거 뭐지? <인디아나 존스>네. 줄 서자’ 하는 거다.(<인디아나 존스>는 1985년 서울극장에서 개봉했다.-편집자)

-선전부장으로 일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은 무엇인가.

=임권택 감독의 <티켓>이다. 개봉날 아침 10시쯤부터 임권택 감독과 주연배우이자 제작자 김지미, 송길한 작가, 배우 박근형이 주차장에 의자를 놓고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임권택 감독이 “오늘 손님이 몇명 들 것 같아?” 하고 물어보면 제작부장이 왔다 갔다 하면서 “암표가 많이 안 나가서 별로 안 들 것 같아요”라고 상황을 전달하고 그랬다. <티켓>은 실제로 관객이 많이 안 들었다. 망했지. 근데 그때 그 영화가 내 기억에 정말 좋았다. 너무 좋아서 관객이 많이 오도록 지라시도 열심히 만들고 신문광고도 열심히 했는데 관객이 많이 안 들었다. 당시 극장업계의 메인 프로그램은 다 외국영화고 특히나 미국영화였다. 그에 비해 한국영화는 초라한 대접을 받을 때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존심을 걸고 버텨낸 선배들 덕분에 나 같은 인간도 영화를 하고 있다. (웃음) 그분들의 선명한 표정들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다. 임권택 감독의 <티켓>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의미와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 작품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영화감독 이준익이 영화를 시작한 계기가 서울극장이라 말할 수 있겠다.

=맞다.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일하지 않았으면 영화 말고 다른 일을 했을 것 같다. 서울극장에서 경험한 영화인들만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서울극장을 운영한 합동영화사는 100편이 넘는 영화 제작편수를 가진 영화 제작사였다. 당시만 해도 영화는 정부에서 허가해준 20개 제작사만 찍을 수 있었다. 충무로에서는 이를 ‘20개 메이커’라고 불렀고 합동영화사는 그중 하나였는데, 영화사를 소유하지 않은 영화인들이 영화를 찍고 싶으면 메이커의 이름을 빌려와서 찍는 대신 대명료를 냈다. 소위 ‘대명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합동영화사에 찾아오는 작가, 감독들이 많았다. 충무로인들은 영화도 잘 모르고 광고 도안을 하는 젊은 나에게도 “이 부장, 내 얘기 들어봐. 내가 말야 시나리오를 강원도에 가서 써왔는데, 말만 해도 다 죽을 거야. 들어봐”라면서 30분간 열변을 토하곤 했다. 속으로 영화하는 사람들은 다 ‘뻥구라’구나 생각했다. 나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창작 열정을 어필하기 위해서 화려한 말과 형용사를 다 동원해서 만들고 싶은 작품을 표현하는 모습이 그랬다.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나는 그럴 능력도 없는데. (웃음) 하지만 그런 영화인들만의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애니깽> 김호선 감독, <애마부인> 정인엽 감독 등 대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나눴던 충무로의 뜨거운 분위기가 나를 신나게 했다.

-올해 서울극장이 <자산어보>를 10주 넘게 장기상영한 걸 아는지. <자산어보>를 인생영화로 꼽는 이들이 <자산어보>를 보기 위해 서울극장을 찾았다고 한다.

=서울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 35년 전 그곳에서 포스터, 신문광고, 간판을 디자인하며 영화를 시작했던 내가 만든 <자산어보>를 오랫동안 상영했다니…. 나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고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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