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산장미팅-장미의 전쟁>부터 <돌싱글즈>까지 ‘연애 예능’의 역사
2021-09-13
글 : 복길 (칼럼니스트)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면
<짝>

가루 비타민 하나를 건넸을 뿐인데 그 뒤로 영양제 이야기가 30분 동안 이어졌다. ‘나한테 별로 흥미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건, 상대방이 “신체 외부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근육 코어 운동을 하듯이 신체 내부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미네랄 섭취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할 때였다. 소개팅을 마치고 주선해준 친구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더니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사랑이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는 건데…! 그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면 처음 만난 날 ‘유산균은 여에스더’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걸…? 사랑을 <자유선언 토요대작전> ‘산장미팅-장미의 전쟁’으로 배운 나는, ‘구애의 춤’을 추지 않는 상대가 야속했다.

온주완이 산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해>를 불렀을 때, 비로소 나는 사랑의 형체를 찾은 것 같았다. 그맘때 읽고 듣던 귀여니의 소설과 임창정의 노래도 모두 그게 사랑이 맞다고 했다. 상대를 향한 작은 관심을 200배로 부풀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명대사를 남발하는 남자…! 그러다 끝내 상대를 향한 사랑보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매력에 도취되어 끝없이 아파하는 남자…! 그리고 무릎 꿇은 남자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이 바보…!’라는 말로 그를 받아들이는 여자…! 나는 사랑의 힘을 긍정하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사랑의 형체는 나를 언제나 폭소하게 만들었다.

‘산장미팅-장미의 전쟁’에서 <고해>를 부르는 온주완.

‘얼레리꼴레리’에 담긴 정서를 생각해보면 로맨스는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예능이다. 임성훈이 진행하던 <사랑의 스튜디오>는 그 오래된 유희를 ‘짝대기’로 형상화했고, <강호동의 천생연분>과 <실제상황 토요일-리얼로망스 연애편지>는 약간의 기류만 감돌아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웃고 떠들던 강호동을 국민 MC로 만들었다. 지금은 보편화된 ‘관찰 예능’ 포맷의 시초 또한 ‘연애 예능’이었다. 박미선의 ‘망상’ 코멘트가 완성시킨 <우리 결혼했어요>, ‘애정촌’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전 국민을 열광케 했던 <짝>은 각각 한국 예능사의 센세이션으로 기록된 프로그램이다.

공중파 예능이 이렇게 사랑을 예찬하는 사이, 케이블 방송사는 좀더 ‘아찔한’ 것을 통해 본인들의 루트를 만들었다. 전문 방송인이 아닌 출연자를 데리고 1대 다수의 ‘시간제 데이트’를 하던 <아찔한 소개팅>은 사는 곳, 가지고 다니는 물건의 가격, 심지어 털의 유무 등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고, 데이트 도중 상대의 목에 부착된 사이렌을 울려 탈락시키고, 탈락 후 저주를 퍼붓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통해 ‘사랑은 고귀하다’는 전제를 박살냈고 시청자들의 사랑과 지탄을 동시에 받으며 오랜 시간 시즌을 거듭했다.

동거형 예능+한국형 오리지널리티+결혼 권장 사회

<강호동의 천생연분>

2014년 불미스러운 일로 종영한 <짝>을 끝으로 잠시 소강상태였던 ‘짝짓기 예능’은 2017년 <하트시그널>을 통해 다시 부활했다. 미국 <MTV>의 <더 힐즈>, 일본 <후지TV>의 <테라스 하우스>와 맥을 함께하는 ‘동거형 연애 리얼리티’ <하트시그널>은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한강이 보이는 근사한 저택에 방송인이 아닌 출연자들을 초대해서 동화 같은 카메라 필터로 그들을 담아내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서사에 감각적인 배경음악을 입혀서 ‘판타지 같은 현실’을 만들었고, 그 모순을 통해 젊은 시청자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시대가 변하는 사이 등장한 ‘썸’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짝짓기 예능처럼 만난 지 하루 만에 서로에게 ‘짝대기’를 드리우거나 ‘커플 성사’를 재촉하는 형태를 무너트렸다. <하트시그널>은 ‘연애보다 재밌는 썸’이라는 관계를 느긋하게 관찰하며 한달간의 동거 생활 속에서 출연자간에 흐르는 다양한 기류를 멜로드라마처럼 포장해, 여전히 ‘로맨스’가 가장 강력한 예능의 소재임을 확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코로나19의 장기화가 사람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부추겼을까? <하트시그널> 시즌3가 종영한 2021년의 텔레비전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종류의 연애 리얼리티가 방송되고 있다. 공중파, 케이블, 종편에 이어 다수의 제작사와 OTT 플랫폼까지 가세한 이 시장에서 가장 큰 파이를 선점한 것은 티빙의 오리지널 프로그램 <환승연애>다. 실제로 사귀다 헤어진 연인들이 출연해 몇주간의 동거를 통해 ‘재회를 할 것인지, 새로운 사랑을 택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 이 충격적인 포맷은 연애 리얼리티에 대한 시청자들의 수용 범위를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시기 방송된 카카오TV 오리지널 <체인지 데이즈> 역시 마찬가지다. 결별 위기에 놓인 세쌍의 커플을 제주도의 별장으로 초대해 파트너를 바꾸어 데이트를 시키는 방송은 연애 과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과거와 달리 연애의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 관계의 지겨움과 처참함을 비추며 사랑의 형체를 다시 만든다.

이혼 경력이 있는 출연자들이 재혼을 염두에 두고 모인 <돌싱글즈> 역시 같은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변형 포맷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짝>을 제작한 남규홍 PD의 <스트레인저>와 <나는 SOLO>는 <하트시그널>과 같은 동거형 예능의 인기에 ‘한국형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 보여주듯이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 촬영 형식을 고수하고, 고전적인 미팅과 데이트를 주선한 뒤 중매꾼처럼 결혼을 권장하기까지 한다(실제로 결혼까지 이른 커플이 생겨 화제였다). 이것은 포맷에 관계없이 ‘로맨스’라는 본질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요구임을 증명 한다.

<하트시그널2>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출연하는 이들의 변화는 나름의 의미를 이끌어낸다. <하트시그널>의 오영주, <환승연애>의 혜선은 여성이 선택당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는 SOLO> 1기의 ‘영식’은 남성이 여성 파트너를 찾기 위해 어필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짝짓기 예능’ 자체가 유익하다는 판단의 당위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약 20년 동안 ‘연애 예능’은 인간의 관음적인 욕망에 ‘로맨스’라는 외피를 둘러 그것을 편리하게 충족시켜주었고, 사람을 재고 평가하고 싶은 시청자들의 속물 같은 근성을 자극해왔다. ‘로맨스’라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소재와, 시청자와의 안전 거리가 절대로 형성될 수 없는 ‘리얼리티’의 결합은 출연자들을 향한 지나친 관심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저속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방송은 다양한 층위의 윤리를 고려하기보다, 틀 안의 문법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선점한다.

‘사랑’으로 웃기기, 그다음은

‘사랑’이라는 소재로 제작되는 리얼리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것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게 ‘안전한 거리’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거리를 만들 수 없다면 ‘사랑’이란 형체를 시청자가 고민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히는 것은 어떨까?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에로스나 ‘결혼’이 최종 목적인 고전적인 형태를 벗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교류를 비추며 ‘사랑’의 정의와 범위에 시청자들이 질문을 품게 만드는 시도는 분명 로맨스 예능에 의미 있는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연출자의 좀더 적극적인 개입과 안전을 위한 극적 구성이 필요한 문제인데, ‘사랑’을 가지고 웃기기로 작정한 기존 연출자들에게 그 일은 오히려 쉬울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로맨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박살내는, 훨씬 더 낭만적인 ‘연애 리얼리티’를 원하기에 이런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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