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 부모가 낳은 청인 자녀인 코다(CODA) 루비(에밀리아 존스)의 음악대학 오디션 도전기이자, 유일한 청인 구성원을 바라보는 농인 가족의 감정적 딜레마를 파고드는 <코다>를 보고 한 사람이 떠올랐다. 농인 부모의 세상을 코다의 시선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의 이길보라 감독이다.
한국 코다 모임 ‘CODA KOREA’의 대표인 이길보라 감독은, 같은 코다로서 주인공에게 깊이 이입했다며 서신을 작성해 <코다> 제작진에 보내는 실험에 동참해줬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작가 출신인 션 헤이더 감독과 <작은 신의 아이들>로 1986년 아카데미 영화제 역사상 최초로 농인 배우로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말리 매틀린 또한 먼 곳에서 날아온 반짝이는 신호에 반갑게 화답했다.
이길보라 감독이 배우 말리 매틀린에게
우선 말하겠습니다. 저는 말리 매틀린 배우의 엄청난 팬입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미국 드라마 <스위치드 앳 버스>를 인상 깊게 보았고요.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의 삶을 다룬 <L워드> 시리즈에 등장한 모습을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차성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는데요. 농인 역시 당연히 성적 소수자일 수 있고, LGBT 농인의 이야기는 LGBT 청인과는 또 다르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활동가이기도 하죠. 2009년 넷플릭스에서 제공한 <오즈의 마법사>에 농인을 위한 자막이 없음을 문제 제기한 후 스트리밍 사이트에 자막 제공을 요구하는 서한을 의회로 보내고, 넷플릭스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결과, 넷플릭스가 2014년까지 모든 프로그램에 자막을 제공하는 데 동의하게 됐지요.
션 헤이더 감독은 영화를 준비할 때 애초에 말리 매틀린 배우를 염두에 두었다고 알고 있어요. 다만 엄마 재키(말리 매틀린)를 제외하고는 농인으로 등장하는 남편 프랭크(트로이 코처)와 아들 레오(대니얼 듀랜트) 역에 청인 배우를 섭외하자는 논의도 처음에는 있었다고요. 그때 “Thank you, but I’m out”(제안은 고맙지만 그럼 난 빠질게요)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답니다. 이런 상황이 당신에겐 참 빈번할 것 같은데요. 그런 상황에서 그렇다면 나는 이 영화의 배역을 맡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 아닌가요.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영화 내용으로 잠시 들어가볼게요. 루비는 음악 레슨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엄마 재키는 레슨을 빠지고 가족이 출연하는 방송사 인터뷰 통역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코다로서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엄마와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건 전문 통역사의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코다들은 화가 나지만 동시에 가족을 위해 통역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을 거예요. 당신은 루비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궁금합니다. 하하, 써놓고 보니 마치 우리 엄마에게 하는 질문 같기도 하네요.
한편 극중 루비의 오빠인 레오가 동생에게 화를 내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제 동생은 저처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코다이기 때문에 제게 똑같은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루비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동생에 대한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낀다는 설정이 사실적으로 다가왔어요. 루비가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엄마가 “오늘 저녁 뭐 먹을까?”라고 태평하게 말하는 부분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요. 이런 부분들을 정확하게 잘 보여주기 위해 많은 지점에서 청인 감독, 제작진과 소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션 헤이더 감독은 매사추세츠주에서 진행될 첫 촬영을 앞둔 밤,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출연진이 이미 친밀한 가족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 또한 농인 커뮤니티의 힘이라고 느꼈어요. 농인 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갔을 때, 아빠가 다른 미국 농인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알았죠, 아빠에게는 한국 청인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말을 쓰는 농인이 우리나라 사람이란 것을요. 물론 저도 코다로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1986년 영화평론가 렉스 리드는 농인이 농인을 연기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청인을 연기하는 청인들이 도처에 있다고, 무슨 차이가 있냐고 되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각주의’라고 꼬집으면서요. 영화 <코다>가 이 오디즘(Audism,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농인이 정말 적습니다. 한두명 정도가 생각날 뿐인데요. 그마저도 배역이 없어 활동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많은 제작, 투자자들이 “농인 배우가 거의 없는데 농인을 어떻게 섭외합니까?”라고 말합니다. 말리 매틀린이란 사람의 삶과 연기자로서의 경력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요? 위와 같은 질문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배우를 꿈꾸는 농인과 코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기에 보내주세요. 고맙습니다.
배우 말리 매틀린이 이길보라 감독에게
안녕하세요. 이길보라 감독님. 저는 한명의 아티스트이자 농인으로서 동등함, 접근성, 포용성에 관한 우리의 권리에 대해 항상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영화 <코다>의 극장 상영에 폐쇄형 자막(closed caption)을 추가하도록 조언하는 것부터 결국 모든 관객이 극장에서 공개형 자막(open caption)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일까지, 배우이자 활동가로서 제겐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어요. 이 영화는 청각장애를 가진 수백만 미국인의 언어, 커뮤니티 그리고 문화를 담고 있어요. 이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어렵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아닙니다. 미국 관객이 가진 자막에 관한 불호에 관해서라면, 한국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결과로 대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배역들이 농인으로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건 사실 저로서도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제가 출연한 많은 작품들(<작은 신의 아이들> <스위치드 앳 버스> <CSI> 등)에서 다수의 농인 캐릭터는 항상 농인 배우들의 몫이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것이 중요했고, 저는 농인 문화와 커뮤니티를 알고 있는 배우들과 일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꼈지요. 출연배우 중 저 혼자 농인이었던 작품들을 할 땐 통역사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에서 가끔은 외로워지는 게 사실입니다. <코다> 촬영장에서는 내내 수다를 떨면서 완전히 내 세상을 만난 거나 다름없었어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농인 커뮤니티 안에 있는 수백만 가지의 이야기 중 하나를 연기하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피부염에 걸린 재키 부부가 병원에서 섹스를 참을 수는 없다고 항변하는 장면이나 아이들에게 콘돔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웃음이 터져서 촬영이 지연되기도 했어요.
다만 코다인 자녀를 대하는 재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꽤나 도전이었습니다. 제가 저의 코다 자녀들에게 통역을 도와달라고 요청할 땐 극중 재키와 정반대의 마음이 들거든요. 저는 영상 통화와 중계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요. 식당에 가면 아이들이 주문하는 김에 제 것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TV 인터뷰 같은 중요한 일을 할 때는 제 전문 통역사에게 의지하곤 합니다. 감독님의 말처럼 아이들은 통역사로 태어난 게 아니니까요!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조금씩 더 많은 배우들이 기회를 얻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변화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난 35년간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제가 목소리를 강하게 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물론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배우가 되려는 농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SNS를 통해 전파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 세계에서 SNS는 공평한 경쟁의 장이면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장소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