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캐시 박 홍의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에는 인도계 미국인 시인 프라기타 샤마가 몬태나대학의 문예창작 과정 책임자로 부임했던 이야기가 등장한다. 수년간 시간강사로 근근이 생활하던 그가 쟁취한 이 기회는 이제 순조로운 정착과 평탄한 미래로 이어질까? <더 체어>를 본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아시아계 여성에게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갈 리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늑한 캠퍼스, 고풍스러운 건물, 늙은 백인 남자들의 초상화 사이에 명문 펨브로크대학 영문학과장으로 부임한 김지윤(샌드라 오)의 사무실이 있다. 비백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각고의 노력 끝에 이 명예로운 위치에 도달한 지윤은 자리에 앉자마자 나동그라진다. 낡은 의자가 암시하듯 그가 선 곳은 유리절벽이다. 영문학과 학생 수는 줄고 예산은 깎이는 가운데, 학교측은 인기 없고 연봉 높은 노교수들부터 내보내라며 지윤을 압박한다. 젊은 흑인 여성 교수 야스민의 종신 임용 문제, 동료이자 사랑하는 남자인 빌이 저지른 사고 등 지윤이 해결해야 할 일들은 점점 꼬이며 불어난다.
그러나 소수자인 동시에 개척자여야 하는 이가 디딘 땅은 척박하다. 책임만 떠맡고 권력은 갖지 못해 여기저기 휘둘리며 모두에게 질타받던 지윤은 깨닫는다. “내가 맡은 게 영문학과가 아니라 째깍거리는 시한폭탄 같아. 저들은 여자가 들고 있을 때 폭발하길 바라겠지.” <마이너 필링스>에서 샤마는 미국에 이민 온 뒤 자신과 흡사한 굴욕을 겪은 아버지를 소재로 한 시를 썼다.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 손에 실패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지윤도 샤마와 비슷하게 실패한다. 그러나 샤마는 대학을 상대로 차별 소송을 제기하고, 지윤은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서야 자리에서 물러난다. 캐시 박 홍은 낭독회에 참석한 어느 한국계 미국인 여학생이 캠퍼스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토로한 경험을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그 학생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는 실패에 머물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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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기만 해봐라>
넷플릭스
부유한 공화당 정치인과 결혼해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던 베로니카(샌드라 오)는 우연히 대학 동기 애슐리(앤 헤이치)와 마주친다. 가난한 화가이자 레즈비언인 애슐리의 속을 긁다 난투극까지 벌인 베로니카, 그런데 병원 침대에서 눈을 뜨니 2년이 지났고 모든 것은 사라진 뒤다. 원제가 <캣파이트>인 블랙코미디로, 다소 산만하지만 샌드라 오의 연기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
<김씨네 편의점>
넷플릭스
<더 체어> 속 지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한국계 캐나다인 가족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이 제작진의 인종차별적 태도를 지적하며 씁쓸한 여운을 남겼음에도 이 작품의 매력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약간 멍청하지만 여자에게 인기 있고 가끔 열받게 하지만 나름 다정한 오빠 정(시무 리우)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샹치와도 조금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