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스탭 한명이 내게 메일을 보내며 “의식의 흐름대로” 썼다고 표현했다.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게 되었다는 재치 있고 귀여운 표현으로 읽혔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글은 최소한의 정보와 객관성에 기대어 비교적 건조하게 작성되어야 하는 편이지만, 지금은 1인칭과 지극히 사적인 느낌을 앞세워, 때로는 줄거리나 정보도 누락시키며, “의식의 흐름대로”를 의식적으로 의식하며 쓰려 한다. 부산영화제를 통해 월드 프리미어로 첫 상영하게 된 개막작 및 파노라마 섹션 작품들 위주로 그렇게 해보려 한다.
작품 선정을 고려하며 임상수 감독의 <행복의 나라로>를 보는 동안 나는 이 영화가 서럽고 사랑스러웠다. ‘서럽고 사랑스럽다’는 이 어색한 표현을 면밀하게 설명할 방법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우리의 삶과 생명과 행복을 포함하여 그 완전한 실체에 대해서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것들에 관하여, 알려진 신중한 정의나 개념과는 무관하게 당당한 기조로 유쾌하게 떠들고 따뜻하게 포옹하고 있는 이 영화가 무조건 좋았다. 무언가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서러움과 가고 있는 여정 자체를 소중하게 만드는 사랑스러움이 <행복의 나라로>라는 이 로드무비의 진가로 느껴졌고 개막작으로 더없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른바 ‘영도 로드 무비’라고 불러도 될 만한 전수일 감독의 <라스트 필름>이 떠오른다. <라스트 필름>에서는 빚쟁이가 된 감독과 그 빚쟁이 감독을 쫓아다니는 채권 추심원이 한조가 되어 부산의 영도 지역을 맴도는데, 놀랍게도 늙고 거친 이 중년의 채권 추심원의 꿈은, 영화다. 발가벗는 느낌을 마다하지 않고 영화 안에 몸을 던진 전수일 감독의 의지도 놀랍고, 실제 이야기인지 허구인지 분별되지 않는 소재의 모호함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강렬한 특정 ‘숏’의 힘에 있다. 장면이 아니라 숏. 나는 <라스트 필름>의 몇몇 숏에서 철두철미한 20세기식 장인의 고집스러운 영화적 미장센과 우아함을 느끼며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특히 간절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하게 되는 주인공의 목욕탕 숏이나,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져버린 주인공이 하수구 홀을 붙잡고 겨우 숨을 쉬는 그 숏의 밀도는 강렬하다. 부산의 젊은 극영화인들은 전수일의 20세기적 고집과 아직은 경쟁해야 할 것 같다.
또 다른 로드 무비인 오세현 감독의 <우수>는 대학생 동창 철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년의 일행 셋이 그의 장례식을 찾아가는 여행길이다. 대체로 조용하고 무심한 것 같지만 꿈틀거리는 유머와 날카로움이 곳곳에 매복해 있는 이 영화는, 사람 셋과 자동차 한대만 있으면 삶의 성찰적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나는 이 영화의 어떤 매력적인 한 장면에서 그것이 꿈이거나 환상이리라는 것을 영화가 후에 알려주기 전에 미리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미 그 사실을 직감하며 알고 보고 있는데도 흥미의 강도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점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사실 안의 환상, 환상 옆의 사실, 어느 쪽이 어느 쪽에 포함되거나 섞여 있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혹은 그렇게 섞여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본연의 긴장을 유발해내는 그런 매력을 오세현 감독은 오랫동안 장률 감독과 함께 프로듀서로 일하며 배운 것 같다.
이영아 감독의 <낮과 달>도 다소 신기한 행로를 지닌 작품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뒤 남편의 고향인 제주도 어귀에 정착해 살기로 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흘러간다. 나는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주인공을 맡은 유다인과 조은지의(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어린 남자와 나이 든 남자의 관계까지 포함한 복수의) 관계가 다양한 논평과 상상을 낳을 만한 여지가 있다고 보는데 둘은 친구이면서, 적이면서, 어떤 사회적 구성의 상반된 모델이면서, 동시에 공존하는 낮과 달인 것이다. 둘의 관계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지치지 않는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신택수 감독의 <요정>에서 요정은 조금 뜻밖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출몰한다. 한 동네에서 작은 커피숍을 각각 운영하던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우연히 어느 날 작은 자동차 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요정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요정이 가져다주는 일은 사실 큰 행운이 아니라 작은 깨달음이다. <요정>은 작고 사소한 소재로도 삶의 기적에 관하여 공감 가능한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박이웅 감독의 <불도저에 탄 소녀>는 그런 점에서 사소한 이야기가 강력한 공감의 일격을 지니게 되는 또 다른 예가 될 것 같다. 한쪽 팔에 문신으로 도배를 한 거칠고 난폭한 10대 주인공 소녀는 아버지의 의문사 이후에 세상을 파헤치는 탐문자가 된다. 그런데 이 소녀는 꾀도 없고 대책도 없다. 전에 없이 크고 두려운 상대를 맞이하여 그녀가 하는 일은 부딪히고 또 부딪히는 일밖에는 없다. 나는 초반부를 보며 이렇게 곤경과 난관만을 직설적으로 쌓아가다가 도대체 어떻게 해법을 찾을 것인가 다소 궁금했는데, 영화는 세련된 해법을 찾는 대신 더 막무가내의 대책 없는 문제를 일으켜 그 폭발력으로 우리를 공감의 장에 떨어뜨린다. 장르와 양식 면에서 수준 높은 두 작품도 소개하고 싶어진다. 강동헌 감독의 <뒤틀린 집>과 홍준표 감독의 <태일이>다. 전자는 공포영화이며 후자는 애니메이션이다. <뒤틀린 집>은 잘 조직된 비주얼과 사운드의 효과로 시종일관 공포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반면에 <태일이>는 시종일관 담담하면서도 수수한 애니메이션이다. 평화시장의 평범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어떻게 우리가 아는 그 역사의 전태일이 되었는지 그날들을 보여준다.
파노라마 섹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걱정이 앞섰던 작품은 사실 <언프레임드>다. 배우 이제훈, 박정민, 최희서, 손석구가 각각 감독이 되어 연출한 단편 옴니버스 프로젝트다. 배우의 면면으로 보자면 의심할 바가 없는 실력자들이지만 연출자로서도 그러할까 걱정하면서 영화를 보았는데, 많이 놀랐다. 물론 초보의 서투름이 없진 않겠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각자의 지향이 뚜렷하고 기획력이 도드라지며 각 인물과 이야기와 장면에 대한 애정과 신중함이 넘쳐난다. 영화 축제의 현장에 이런 작품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군가는 훗날 뛰어난 배우-감독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