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강릉국제영화제]
GIFF #3호 [기획] ‘영화’에 뛰어든 프랑스 문학가 ‘조르주 페렉’
2021-10-24
글 : 김호영 (한양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조르주 페렉의 영화 사용법’ 특별전

조르주 페렉은 현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다양한 영화 작업에 참여한 영화인이다. 그가 ‘영화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순수한 영화적 열정 때문이다. 동시대 다른 작가들(이를테면, 누보 시네마 그룹의 작가들)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결국엔 문학 영역의 확장이나 문학성의 회복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페렉은 영상과 사운드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영화 자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이번 ‘조르주 페렉의 영화 사용법’ 기획전에 소개되는 다섯 편의 영화들은 그의 독창적인 영화 스타일과 작가로서 그의 특별했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해주는 작품들이다.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아우르는 이 영화들 안에는 문학에서 영화로의 단순한 외도가 아니라 문학인이자 영화인으로서 두 장르를 활발하게 오갔던 그의 자유로운 창작 정신이 깊이 새겨져 있다.

‘작가’ 페렉은 1965년 중편소설 <사물들>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문단에 센세이셔널하게 데뷔했다. 15년 남짓한 활동 기간 동안 소설과 시, 희곡, 시나리오, 에세이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전 방위적인 글쓰기를 시도했고, 탁월한 언어감각과 실험 정신, 풍요로운 서사, 섬세한 감수성 등을 골고루 선보였다. 초기에 페렉은 시대와 사회 분석에 집중했지만, 이후 울리포(Oulipo)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치열한 언어 탐구에 몰두한다. 또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정치한 소묘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공간의 종류들>(1974) 같은 뛰어난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한다. 1978년 페렉은 자신의 모든 문학적 경향을 망라한 장편소설 <인생사용법>으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을 수상하며, 이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1982년 45세의 나이로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페렉은 현재까지도 플로베르만큼 정확한 묘사와 누보로망 작가들만큼 급진적인 실험정신 그리고 프루스트만큼 섬세하고 예리한 감성을 작품 안에 모두 담아낸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세리 누와르 스틸

‘영화인’ 페렉의 창작 활동은 그의 문학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글쓰기 작업만큼이나 다채롭고 도전적이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실험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었고, TV용 영화 제작에도 자주 참여했다. 주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의 영화들에는 동시대 프랑스 영화계를 지배했던 절망과 불안의 서늘한 기운이 맴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벨바그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영화 토양을 개척하고자 했던 젊은 영화인의 패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페렉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영화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해갔는데, <세리 누아르>(1978)와 <엘리스 섬 이야기>(1979) 등 다수의 작품에서 시나리오 또는 각색 작업을 맡았고, <잠자는 남자>(1974)와 <배회의 장소들>(1975) 등에서는 직접 연출도 담당했다. 또 카트린 비네의 영화 <돌랭쟁 드 그라츠 백작부인의 게임>(1980)의 제작을 맡는가 하면, <개막>(1981)이나 <눈 먼 시선>(1982) 같은 몇몇 단편 영화들에서는 텍스트의 집필 뿐 아니라 낭독 역할도 수행했다. 급격한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알고 보면 페렉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만의 독자적인 영화 길을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스 섬 이야기 스틸

이번 기획전에 소개되는 영화들 중 <잠자는 남자>는 영화인 페렉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이다. 페렉은 자신이 쓴 동명의 소설 <잠자는 남자>(1967)를 직접 각색하고 연출했는데, 베르나르 케이잔과 공동 연출을 맡았지만 전체적으로 페렉의 의도와 스타일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허무와 고립감에 시달리는 한 청년의 정신적 방황을 다룬 이 영화는 젊은 시절 페렉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소설가 출신 감독에 대한 편견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파격적인 영상들과 정교한 사운드로 구성되어 있다. 장편 상업영화 <세리 누아르 Série noire>(1979)는 페렉의 재기 넘치는 언어와 알랭 코르노 감독의 완벽한 형식적 통제가 만나 탄생된 범죄 영화의 걸작이다. 발표 당시 유니크한 분위기와 스타일로 쇠락해가는 프렌치 누아르 장르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주인공 프랭크 역을 맡은 파트릭 드웨어의 광기어린 연기만큼이나 온갖 비속어와 언어유희를 녹여낸 페렉의 기상천외한 대사가 큰 화제를 모았다.

잠자는 남자 스틸

<배회의 장소들>(1975)은 페렉이 자신의 동명 에세이를 바탕으로 직접 연출한 기록영화다. 전쟁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 파리의 거리를 배회하던 유년기의 아픈 기억들이 담담하게 나열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차례로 소환된다. 영화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를 재현하기보다 기억의 파편들을 담고 있는 장소와 사물들을 차분한 시선으로 따라가는데,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오브제들에는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감정과 정서들이 응축되어 있다. 한편, TV용 영화로 제작된 <엘리스 섬 이야기>(1980)에서 페렉은 이전 작품들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페렉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맡아 뉴욕의 엘리스 섬에 새겨진 유대인 이주의 역사를 되짚는데, 엘리스 섬은 189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으로 이민오는 이민자들이 입국 심사를 받던 곳이다. 영화 제작 후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이 영화를 통해 페렉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배회의 장소들 스틸

마지막으로 <빌랭 길을 오르며>(1992)는 페렉의 영화가 아니라, 페렉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페렉은 그가 남긴 글과 사진들로 영화의 제작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빌랭 길은 파리 북쪽 19 지역에 위치한 거리다. 과거에는 가난한 노동자나 서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공원으로 재개발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페렉은 이 거리에서 태어나 약 6년 동안 살다가 나치의 위협을 피해 떠났고, 30대 후반에 ‘장소들’이라는 글쓰기 프로젝트를 위해 다시 이곳에 찾아온다.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거리의 모든 것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두는 동시에,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복원하려 한 것이다. 페렉의 시도는 미완으로 끝났지만, 동료이자 친구인 로베르 보베르가 그의 사후에 감동적인 영상과 텍스트로 ‘빌랭 길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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