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서 여자배우들이 뛰고 움직이면서 만들어낸, 빛나는 순간을 모아봤다. 한국영화의 전형성을 깼다고 생각되는 장면과 배우들을 소개한다. 미처 담지 못한 <마녀>의 김다미, <걷기왕>의 심은경, <야구소녀>의 이주영 배우도 멋진 순간들을 만들어냈음을 언급하고 싶다.
전지현 <엽기적인 그녀> <블러드> <도둑들> <암살> <킹덤: 아신전>
<엽기적인 그녀> 속 그녀(전지현)는 견우(차태현)와 교복을 입고 클럽만 누빈 게 아니라, 스쿼시장과 검도장도 찾았다.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라켓을 시원하게 휘두르고, 검도복에 호구를 갖추고는 목도를 정확하게 써 일격을 가한다. 그녀는 엽기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운동도 잘한다. <엽기적인 그녀>는 기존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의 공식을 깬 작품이다. 그녀라는 딱 맞는 캐릭터를 입은 배우 전지현은 이후 몸을 쓰는 연기에 도전해왔다. 검술 실력을 가진 뱀파이어(<블러드>), 줄타기 전문 도둑(<도둑들>), 뛰어난 저격 실력을 가진 독립운동군(<암살>), 활쏘기에 능한 여진족 소수민족(<킹덤: 아신전>) 등, 전지현이 긴 팔다리를 움직이면 늘 태가 난다.
신은경 <조폭마누라> <조폭마누라2>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빗속에 검은 정장을 입은 무리가 나타나 한 남성을 집중 공격한다. 번개가 번쩍하자 위험에 처한 조직원을 구하기 위해 우뚝 선 두목이 실은 하얀 얼굴의 여성임이 드러난다. 그의 이름은 깔치(신은경). 주로 쓰는 무기는 양날가위다. ‘깔치 형님’이 손안에서 뱅글뱅글 돌리던 가위를 던지자, 보기 좋게 날아간 가위가 어깨 세명의 얼굴을 긋는다. 신은경 배우는 <친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한국영화가 한동안 사랑했던 ‘빗속 액션 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인물이다. X세대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조폭마누라>를 준비하기 위해 홍콩 무술감독 원진에게 3개월간 호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액션 신을 촬영하던 도중 각목에 눈 부위를 맞고 실명 위기를 겪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배두나 <괴물> <코리아> <페르소나> <센스8>
국가대표 양궁 선수, 북한의 국가대표 왼손잡이 탁구 선수, 테니스 치는 영어 선생님, 격투기 선수 재벌 2세…. 배우 배두나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유난히 운동과 접점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배우 스스로 가장 어려웠다고 말하는 작품은 넷플릭스 시리즈 <센스8>. 탄탄한 복근을 드러낸 싸움의 고수 박선(배두나)은 표정 변화나 흐트러짐 없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배두나의 노력이 있었다. “기초체력, 기초근육 늘리는 데만 아침에 1시간 반, 저녁에 1시간 반씩 운동했다. 중간에는 스턴트 리허설이라고 해서 같이 합을 맞춰 훈련했다.”(<씨네21> 1251호) 배두나는 <센스8>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근육 만들기에만 집중했을 정도로, 태생적인 마른 몸이다. 반대로 말하면, 배두나는 마른 몸을 가졌을지라도 열심히 운동하면 멋진 근육을 꿈꿀 수 있다는 생생한 예라는 뜻이다.
하지원 <형사 Duelist> <1번가의 기적> <코리아>
상투를 틀고 초립을 쓴 조선 시대 여형사 남순(하지원)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슬픈눈(강동원)과 돌담길에서 만나 서로 칼을 겨누며 싸운다. 대사는 거의 없고 칼소리만 울려퍼지는데, 양손에 검을 쥔 하지원은 무술과 무용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몸동작을 선보인다. 유연하고도 빠른 움직임은 기존의 액션과는 다른 그림이다. 이는 <형사 Duelist>를 위해 선무도와 탱고를 배운 결과물이었다. 하지원은 때로는 강인한 여전사, 시고니 위버를 꿈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하루에 다섯, 여섯 끼니를 고기를 먹으면서 근육을 키웠고, 하루 8시간을 웨이트트레이닝에 바쳤어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쿠터, 바이크, 필라테스, 테니스, 수영도 배웠고요.”(<씨네21> 815호) <에이리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7광구>에서 그는 해저장비 매니저 캐릭터를 위해 몸을 만들었다. 드라마 <다모>에서는 와이어 액션과 리듬체조를 연마했고, <1번가의 기적> 속 권투선수 캐릭터를 준비할 땐 연습 첫날부터 흠씬 두들겨 맞으며 맷집을 키웠다. 탁구 선수 현정화의 추천으로 <코리아>에 캐스팅된 뒤로는 6개월간 탁구에만 매진하기도 했다. 하지원이 연기한 캐릭터 중 빼놓을 수 없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 속 스턴트우먼 길라임은 이제 운동하는 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문소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파이>
“양파가 1kg에 990원!” 박수를 치며 마트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미숙(문소리)은 실은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다. 포지션은 센터백, 왕년의 에이스다. 가까스로 올림픽에 출전했건만, 한국 대표팀은 상대팀 덴마크에 지고 있는 상황. 이때 미숙은 라이벌이었던 혜경(김정은)에게 볼을 전달받아 그림 같은 슛을 쏜다. 골대 바로 앞에서 공을 던지면 십중팔구 골인하므로, 핸드볼 규칙상 슈팅제한 지역이 있다.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없기 때문에 핸드볼 선수들은 최대한 골대 가까이로 몸을 던져 뜬 상태로 슛을 쏜다. 한껏 도약해 공을 던진 미숙은 몸을 동그랗게 구르면서 착지한 뒤 포효한다. 동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뛰고 구르면서 탄탄해진 다리,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공을 잡아채는 손, 땀으로 말린 잔머리 등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문소리 배우는 실제 핸드볼 선수를 보는 것처럼 가슴 뛰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그는 늘 온몸의 근육을 잘 쓰는 배우였다. <오아시스>에서는 중증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며 얼굴 근육과 팔다리 근육의 경직된 움직임을 연구했고, <바람난 가족>에서는 한밤에 애크러배틱 무용을 선보였으며, <스파이>에서는 예기치 않게 국정원 요원인 남편의 정보 활동에 휘말려 헬기에 매달리고 한강에 떨어지는 연기를 펼쳤다.
이시영 <언니> <스위트 홈>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 홈>에서 특수부대 출신 소방관 서이경(이시영)은 거미 괴물을 피해 환풍구에서 빠져나온다. 이때 쫓아오는 괴물보다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건, 이시영 배우의 등근육이다. 세모꼴로 쪼개진 이시영의 흉요근막은 정말이지 경이롭다. 생존의 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순간, 한 인간이 자신의 몸을 십분 이용해 스스로를 구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도 다른 캐릭터의 도움 없이 여성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낸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이시영의 근육이 너무 선명한 탓에 언급한 장면을 두고 CG의 힘을 빌린 게 아니냐는 논란도 벌어졌지만, CG 없이 배우 본인이 6개월간 벌크업한 결과물이었다. 이시영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운동에 매진한 뒤로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2010년 MBC <베스트극장>에서 복싱 선수 캐릭터를 맡을 뻔했던 그는 그길로 복싱에 빠져 2011년 각종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에는 프로 선수로서 인천시청 복싱팀에 입단했고, 같은 해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해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2019년 개봉한 <언니>는 그의 원톱 액션영화였다. 붉은색 짧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불편하게 액션 연기를 해야 했기에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앞으로의 필모그래피를 더욱 기대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