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보이는 몸에서 말하는 몸으로
2021-11-10
글 : 임수연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미디어를 어떻게 바꾸고 있나

운동이라는 것을 의식해본 것은 고3 수능이 끝난 이후가 처음이었다. 동생이 태권도 학원을 다닐 때 난 피아노를 배웠고, 점심시간 남자애들이 운동장을 차지하고 축구나 농구를 할 때 슬렁슬렁 그 주변을 산책하며 배를 꺼뜨렸고, 그리고 체육 시간! 피구는 정말 기분만 상하는 운동이다. 공을 던져 누군가를 맞히는 일에 재능이 없던 터라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공을 피해다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는데, 갑자기 공을 맞으면 서럽고(머리나 얼굴에 맞으면 진짜 상처받고!) 남은 시간 지루하게 남들 하는 것만 구경해야 하는 심술궂은 스포츠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반드시 살을 빼야 한다는 분위기가 또래 집단 사이에 형성되자 덩달아 휩쓸려서 이제 운동을 해야겠다는 조바심이 처음으로 생겼다. 요즘엔 모두가 말랐기 때문에 ‘초마름’으로 가야만 눈에 띌 수 있고 키에서 115~120을 뺀 체중을 만들어야 ‘미용 체중’에 다다를 수 있다나. 인터넷에서 본 다이어트 성공 후기는 한끼에 달걀 하나, 토마토 하나, 고구마 하나만 먹고 매일 2시간씩 유산소운동을 했더니 30kg을 감량했다고 ‘간증’하고 있었다. 따라 해봤다. 이틀을 못 넘겼다. 그리고 폭식을 더 길게 했다. 당시 내가 믿었던 최고의 운동인 걷기와 에어로빅을 하며 절식과 폭식을 반복했더니 결국 대학 입학 전까지 살은 1kg도 못 뺐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한참 뒤에 알았다. 걷기는 물론 좋은 운동이지만 그것만 해서는 안된다. 체중에 비해 체지방률이 높고 상하체 모두 근육이 부족한 사람에게 필요한 건 꾸준한 근력운동이다. 나처럼 턱걸이를 1초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등근육과 가슴근육, 복근을 키워야 하는데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근력운동은 대체로 ‘팔뚝살 빼는 운동’, ‘뱃살 빼는 운동’, ‘허벅지 안쪽 살 정리하는 운동’이란 라벨이 붙어 여자들 사이에서 주로 공유됐는데, 특정 부위만 5~10분 움직이는 건 근육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안된다. 깡마른 연예인들의 ‘다이어트 자극 사진’은 내가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등을 떠밀었다. 스키니진을 입으려면 다리에 군살이 없어야 하고 종아리 근육은 보톡스를 맞아서라도 없애야 한다. 여배우들의 시상식 드레스 사진에는 꼭 그들의 승모근을 지적하거나 혹은 승모근이 없어서 예쁘다는 댓글이 달리곤 했다. 세상에 승모근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건만 이후엔 자꾸 사람의 어깨 모양을 의식하며 스트레칭에 열을 올렸다.

여자들, ‘근’수저를 꿈꾸다

마른 몸 그리고 예쁘다고들 하는 몸선에 대한 집착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구속하는지 머리로는 너무 잘 안다. 그런데 나는 날씬해야 한다. 부조리한 억압은 사라져야 하지만 그 억압 속에 허우적대는 모순에 근본적인 균열이 간 계기는 몇권의 책이었다.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필자의 신들린 유머 감각에 낄낄대다가 세상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시합이 있음에 벅찬 마음으로 공감하며 결국 펑펑 울게 만드는 에세이집이다. 종아리가 굵어질까봐, 햇빛에 얼굴이 탈까봐, 혹은 남자들이나 하는 운동을 여자가 한다고 별나게 쳐다볼까봐 등한시했던 축구가 이렇게 여자들을 미치게 할 수 있는 세계였다니! 일하는 여성 10명이 각자의 운동에 대해 쓴 <보통 여자 보통 운동>, 운동에 대한 건강한 욕망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야기하는 페미니즘 서적 <운동하는 여자>, 스포츠 기자가 여성의 운동에 관해 쓴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여성이 근육을 만드는 기쁨을 예찬한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 등은 출판계에서 화제가 됐다.

발빠르게 움직이고 직접 행동하는 여성들은 이미 현실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성을 위한 스포츠 플랫폼 위밋업스포츠에서는 축구, 배구, 럭비, 풋살, 농구 등의 클래스가 열린다. 신혜미 위밋업스포츠 대표는 여성 스포츠인으로서 경력 단절을 경험했고, 양수안나 대표는 일반 여성들이 스포츠 참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깨닫고 함께 위밋업스포츠를 만들었다. 신혜미 대표는 “여성에게 맞지 않는 운동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주입받는 편견일 뿐”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모두 운동을 잘한다거나 특히 축구나 농구를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편견도 사실 남자들을 힘들게 한다. 그냥 각자에게 적합한, 신체와 운동 능력에 맞는 운동을 하면 된다.” 3년 전 40대 이상 여성들이 팀 스포츠를 할 수 있는 무대가 없다는 생각에 ‘언니들 축구대회’를 열었던 그들이 변화를 감지한 것은 2019년부터다. 클래스를 듣는 여성들은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에 필요한 근육을 키우면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지 않게 됐다. 허벅지나 종아리 근육이 단단해지면 스키니진을 입을 때 태가 안 난다는 식으로 조심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신혜미 대표에 따르면 “위밋업스포츠의 클래스를 듣는 분들은 슈팅을 세게 때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종아리 근육을 키울 수 있냐, 농구공을 멀리 던지기 위해서는 어떤 웨이트 운동을 해야 하느냐 같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수강생 중 한명은 그에게 “요즘엔 퍼스널 트레이닝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살을 빼고 라인을 잡기 위해 유산소 운동 위주로 했다면 지금은 원하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 웨이트를 한다”는 반가운 말도 전했다.

미디어는 현재하는 욕망의 증폭제다. 특히 TV의 가장 강력한 소비층인 여성들의 각성엔 그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싶은 걸 더 잘하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기쁨을 알아가는 여성들의 욕구는 다양한 형태로 매체에서 대변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운동뚱>은 <맛있는 녀석들>의 김민경이 더 건강하게 잘 먹기 위해 다양한 운동을 체험하는 디지털 숏폼 예능이다. 그런데 김민경이 레그 프레스 340kg과 레그 익스텐션 196kg을 해낼 때, 헬스 10년차인 20대 남자를 헬스 3주차인 40대 여자 김민경이 허벅지 싸움으로 이길 때, 그것은 ‘근수저’ 김민경 개인만의 성취가 아니게 된다. <오늘부터 운동뚱>의 서현도 PD에 따르면 김민경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코치들은 “누군가의 동작을 그대로 카피하는 연상 작용, 응용력과 반사 신경”이 뛰어나다고 꼽는다. 과거 잘 먹는 개그우먼으로 주로 소비됐던 김민경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운동을 하는 방송에 거의 출연 중이고, 다양한 신체를 긍정하고 오히려 다각도로 장점화할 수 있는 사례를 남긴다. 그렇게 연예인 김민경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현실에서도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서현도 PD는 “필라테스는 마르고 몸매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오늘부터 운동뚱>을 보고 ‘나도 언니 때문에 필라테스를 하고 싶어졌다’는 댓글이 꽤 많이 달리는 것을 보고 우리가 조금 다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나 생각했다”고 전했다.

방송인으로 전향한 운동선수 출신 남자들에 비해 거의 조명받지 못한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일상은 <노는언니>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고, 올해 도쿄올림픽의 최고 화제는 4위를 차지한 여자 배구였다. “남자 배구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셨는데 이제 아기자기한 맛의 여자 배구를 보시게 될 것”이라는 무례한 해설로 폄하되고, 흥국생명을 ‘미녀군단’이라고 소개하고, 김연경이라는 천재가 등장했을 때 ‘남자 김세진’으로 인식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김연경과 김희진, 박정아, 양효진은 그 자체의 멋짐으로 이야기되며 톱스타 대우를 받고 예능 프로그램에 섭외된다. 제1회 올림픽을 만든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펜싱, 승마, 조정과 같은 스포츠에 여성이 참가하면 곧 보기 싫은 스포츠로 전락한다”라며 여성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2020 도쿄올림픽의 여성 선수 참여 비율은 48.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같은 진보가 있는 사이 상대팀 공을 완벽히 블로킹할 수 있는 큰 키와 다부진 어깨, 강력한 스파이크를 날릴 수 있는 손바닥, 높은 점프를 가능케 하는 단단한 종아리, 정확한 서브를 날릴 수 있는 후면 삼각근은 경기를 잘할 수 있는 조건을 타고난 여성이 부단한 노력으로 능력치를 끌어올린 근사한 신체로서 더 활발히 이야기됐다. 여자답지 않다거나, 남자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뛰어난 배구 선수의 모습이다.

변화하는 미디어 속 여성

<골 때리는 그녀들>
<스트릿 우먼 파이터>

<골 때리는 그녀들>과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2021년을 결산할 때 꼭 언급되어야 할 예능 프로그램이다. 역대 가장 많은 여성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모델 한혜진은 발톱이 빠지도록 공을 찼고, 다리 부상을 입은 개그우먼 오나미는 경기를 마저 뛰고 싶다며 벤치에서 오열했다. 팀 스포츠의 매력에 홀린 여자들은 승부차기까지 가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온몸을 불태웠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출연자들은 축구하느라 허벅지가 갈라지고 종아리가 두배가 됐다고 뿌듯해하고, 시청자들은 내 다리는 XS 사이즈 청바지를 입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움직이고 싶은 만큼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한국의 날고 기는 여성 댄서들이 크루별로 출연해 배틀을 벌이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쎈 언니’의 ‘기싸움’을 기대하는 것 같은 Mnet 특유의 연출을 출연자들 스스로 박살낸다. SNS에서 우후죽순으로 터지는 사건들을 방송은 한참 뒤에 따라잡는 시대에, 시청자들은 이들끼리 진작에 인스타그램 ‘맞팔’이 되어 있고 서로 응원하는 댓글을 다는 사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러니 리정이 “약자? 난 약자였던 적이 한번도 없는데?”라고 할 때, 엠마가 “난 100명이 춤을 춰도 나만 보이게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할 때 그건 근거 있는 자신감에 기반을 둔 그들의 움직임을 더 멋지게 만드는 애티튜드가 된다. 댄서들은 전부 ‘마른 근육’을 갖고 있다는 것은 편견이었다. 왁킹부터 브레이킹까지 아우르는 춤의 장르만큼 출연자들의 몸은 다양하고 각자의 영역에 최적화되어 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팬덤은 그들의 근육이 잘 드러나는 사진에 특히 반응하며 팝핑과 크럼프를 하려면 어떤 운동이 필요한지, 댄서들이 어떻게 근육을 만들었는지 진지하게 논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거 ‘다이어트 자극 사진’ 속 여자배우들이 캐릭터를 통해 몸의 변화에 합류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사실 한국에는 몸을 잘 쓰는 배우들이 예전부터 참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족한 건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전지현은 광고나 화보에서 보여주는 몸짓만으로도 얼마나 움직임에 능한 배우인지 알 수 있지만, 글로벌 프로젝트 <블러드>를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액션을 위한 몸을 단련할 수 있었다. 3개월간 LA와 중국을 오가며 홍콩 출신 무술감독에게 검술, 공중날기, 180도 회전 발차기 등 고난도의 액션 훈련을 받았던 전지현은 이후 <도둑들>에서 와이어에 매달려 줄을 타는 고난이도의 무술을 보여줬다. 하지원은 <시크릿 가든> 이전에도 외줄 타기와 선무도가 가능한 배우였다. 물론 그는 <형사 Duelist>와 <7광구> <1번가의 기적>에서 좋은 액션을 보여줬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가 흥행과 작품성 모두를 잡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땀 흘리는 중년 여성들이 나오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흥행에 성공해도 그 이후에 비슷한 기회들이 또 주어지지 않은 것은 한국영화계가 여성배우의 움직임을 보다 과감하게 쓰는 시도에 있어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방증한다. 그럼에도 영화계 역시 강인한 여성이 나오는 다양한 기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신인 여자배우들의 액션을 전면에 내세운 <마녀> 시리즈가 시장에서 상품성을 인정받았고, 박소담도 원톱 액션영화 <특송>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준비 중이다. 10월15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시리즈 <마이 네임>은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마약 조직원의 언더커버가 된 여자가 주인공이다. 언더커버는 <무간도> <신세계> 등 대체로 남자배우들이 도맡았던 캐릭터다. 배우 한소희는 근육만 10kg 증량하며 이 드라마를 준비했다. 김민수 무술감독은 “헬스장에서 만드는 근육과 맨몸 액션을 위해 필요한 근육은 다르다.

<마이 네임>

한소희 배우는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기본적인 체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뒀다”라며 그의 훈련 방식을 소개했다. “몇십년 동안 무술 을 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3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트레이닝을 받았다. 처음에는 줄넘기를 100개도 하지 못하던 배우가 나중에는 몇천개씩은 우습게 했고, 100합 정도 되는 섀도복싱으로 늘 기초 동작 훈련을 하다 보니 자기 몸의 변화를 알게 됐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자기가 액션을 할 수 있는지 알아갔다.” 가령 그냥 주먹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몸통을 크게 비틀면서 코어로부터 주먹이 나가는 법을 몸이 터득할 때 주인공이 건장한 남자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파워에 설득력이 생긴다.

김민경에게 ‘이것도 해달라’며 새로운 운동 종목을 추천하고 싶고, ‘FC 불나방’ 박선영의 가슴 트래핑을 보면 내 가슴이 함께 반응하고, 이제는 연예인 다이어트 식단이 아니라 3개월 만에 근육만 10kg 늘린 한소희의 운동 루틴이 궁금하다. 개개인의 몸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여성들과 공명하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를 긍정하는 길일 테다. 다양성을 재현하는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