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순정이 다 뭐여
2021-11-19
글 : 배동미
글 : 백종헌
동명의 스토리툰 원작으로 한 <싸나희 순정> 촬영 현장을 가다

2020년 여름이 1973년 이후 최장 장마를 기록한 해라는 걸 기억하는가. 50일 넘게 장맛비가 쏟아지는 지역도 있었는데, 영화인들에게 여간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슬럼프에 빠진 시인과 동화작가를 꿈꾸는 시골 농부의 동거를 그린 <싸나희 순정> 현장도 장마로 인해 여러 번 연기됐다. 주인공 시인 유씨를 연기하는 전석호 배우가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더이상 촬영을 미룰 수 없는 마지노선에 와 있다. 배수의 진을 쳐놓고 찍는 중”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장마가 끝나자 본격적인 무더위가 이어졌다. 총 23회차 중 13회차에 접어든 8월16일, 촬영지인 전라북도 고 창군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스마트폰은 기온 33도를 가리켰다.

<싸나희 순정>은 시를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유씨가 충동적으로 기차에 올랐다가 충청도 시골 마을 마가리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순박한 시골 주민 원보(박명훈)의 집에 얹혀살던 유씨는 팬티 바람으로 방바닥에 누워 있다가 차림 그대로 동네 슈퍼인 ‘우주 슈퍼’를 찾아 혼이 나는데, 34신은 우주 슈퍼에서 시작해서 널따란 논으로 이어졌다.

도망치는 유씨가 논두렁을 뛰어가고 자전거를 타고 논을 지나던 원보도 그 모습을 지켜본다. 벼에 아낌없이 햇볕을 쬐어주기 위해 나무도 그늘도 없는 논두렁에서 서서 촬영 현장을 메모하고 있자니 굵은 팥죽땀이 줄줄 흘렀다. 30분 정도 서 있었나, 머리가 띵할 정도로 더워서 시계를 보면 시간이 5분 정도 흘러 있을 정도였다.

“덥죠? 오늘은 그래도 좀 시원한 편이에요.” 막 첫신을 마친 박명훈 배우가 땀을 닦으며 웃었다. <기생충>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순박한 시골 농사꾼이 된 그는 앞머리를 내리고 고구마색 양말과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나마 바람이 불어서 시원하다는데, 벼와 함께 익어가며 연기하는 배우들이 대단했다. 맨다리를 내놓고 난감한 상황을 연기하는 전석호 배우의 목덜미에도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의 오목한 인중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오늘 촬영은 유씨가 마을 사람들하고 말을 섞게 되는 시작점”이라며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 관객이 웃을 수 있는 유머스러운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11월25일 개봉하는 <싸나희 순정>은 동명의 스토리툰(글 류근, 그림 퍼엉)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을 다룬 데뷔작 <코르셋>으로 90년대 말 충무로에서 활약한 정병각 감독이 연출을 맡아 약 23년 만에 돌아왔다.

01 “그거 빤스 아녀?” “팬티 아닙니다. 반바지예요!” “이 변태 자식이.” 유씨가 팬티만 입고 논가를 달리자 마가리 주민이 대 빗자루를 들고 뒤쫓아온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막히는 한여름 낮. 뜀박질이 여러 번 이어진다. 그렇게 탄생한 34신은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전석호 배우는 이 소동에 대해 “이 사건을 계기로 유씨가 마가리 사람들과 친해진다”라고 설명했다.

02 영숙(김재화)이 운영하는 우주 슈퍼 안. 고창의 한 슈퍼가 <싸나희 순정>의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탈바꿈했다. 슈퍼 안쪽에 자리한 안방에서는 주인장의 노모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싸나희 순정> 제작진은 영화 촬영을 이어갔다. 마가리 주민들 사이로 섞여들어가는 유씨와 같은 현장이었다.

03 “정병각 감독님은 영화계의 대선배님이자 선생님이잖나. 예순이 넘어 오랜만에 연출하시는데 정말 열정적이다. 이런 한여름에도….”(박명훈) 한국영화아카데미 3기인 정병각 감독(오른쪽)은 <코르셋>(1996)으로 주목받은 뒤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와 함께 10대 영화 <세븐틴>(1998)을 연출했다.

04 “저 보러 오셨어요?” “그런 거 아녀유.” “그럼 저 바람 좀 쐬어주실래요?” 금붕어 어항을 보러 카페를 자주 찾는 원보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카페 사장(심은진)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을 하자고 제안한다. 아이돌 그룹 베이비복스 출신 심은진 배우가 카페 사장으로 변신해 원보와 미묘한 관계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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