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서는 즉각적이지만 불가해한 배우다. 아프리카 원주민 춤을 추며 흐느끼는 <버닝>의 해미,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사람을 죽이는 <콜>의 영숙을 보고 있자면 전종서 이전의 계보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연애 빠진 로맨스>의 자영은 그런 그가 로맨스영화를 한다면 택할 법한 독특한 캐릭터인 동시에 일과 연애에 관한 20대의 보편적인 고민까지 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섹스는 너무 하고 싶지만 더이상 사랑 같은 감정 노동 서비스는 하지 않겠다는 낯 뜨거운 말을 주절대는 본심에는, 첫사랑이라고 생각한 남자에게 3년 넘게 섹스 파트너로만 취급받은 데서 온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다. 전종서는 한국 로맨스영화에 자영 같은 돌출을 용인시키면서, 상대 배우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가는 리듬까지 조율해낸다.
-주관이 확실한 배우라는 인상이 있어서 <버닝> <콜>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처럼 강렬한 작품 이후에 <연애 빠진 로맨스>를 어떻게 선택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전작의 영향으로, 뭔가 변화를 주려고 선택한 작품은 아니었다. 장르나 캐릭터는 나중에 생각했고 그냥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선택한 게 컸다. 실제 내 모습과 자영 캐릭터는 너무 거리가 멀다. 술도 안 먹고 친구들에게 자영만큼 여과없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이성을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나지도 않는다. 내쪽에서 적극적으로 대시한 적도 없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자영이 하는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이 됐다. 그런데 딱 하나, 서슴없이 말을 내뱉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처음에 이 작품을 선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감독이나 우리를 연기한 상대 배우 손석구와는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개인적으로는 자칫하면 아주 이상해질 수 있는 영화라는 우려가 있었다. 기존 상업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나 표현이 존재했으니까. 사실 그 이유 때문에 선택을 했으면서도 양날의 검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작품을 가볍지만 가볍지 않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손석구 배우와의 합이 중요했다. 소재가 강렬한 만큼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는 대화를 제일 많이 나눴다.
-어떤 점이 조심스러웠나.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가 감당할 수 있는 표현의 수위나 설정의 세기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이 시나리오는 지뢰밭이었다. (웃음) 배우 입장에서는 관객이 센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보여드려야 했다. 자영이 자유분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말만 그렇게 하고 행동은 제3자처럼 한 발짝 떨어져 있다. 진심으로 연애를 하기 싫고 잠자리만 갖고 싶은 것과, 연애는 무서워서 더이상 못하겠지만 저 사람의 깊은 부분을 먼저 보고 싶다는 건 다르다. 비겁하지만 상대를 전부 알기 전에는 감정을 시작하기 싫어서 잠자리부터 갖고 싶다고 핑계를 대는 거다. 그런 식의 디테일을 살려야 했다. 선배와는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시나리오 전체를 봤을 때 우리는 결국 자영에게 진심을 주고, 확신을 갖기 전까지 자영은 절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둘 사이에선 아무 일도 벌어진게 아니다. 그것을 시작점으로 가져갔다.
-자영은 자신이 인생의 ‘조연’이라는 걸 깨달은 29살 여자다. 실제로는 데뷔작부터 주연만 맡고 있지만(웃음), 또래로서 자영과 같은 고민은 없나.
=운 좋게 데뷔했지만 연기자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보다는 지금, 물론 자영과 디테일한 내용은 다르지만, 나름의 고민들이 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내가 고민도 없고 운도 좋고 쉽게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도 생각을 많이 하면서 작은 거 하나를 하더라도 모든 걸 쏟으면서 한다. 배우로서 무언가 되고 싶다는 사명감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 작품을 하면서 여기까지는 해봐야 한다는 건 확실히 있다.
-여기까지 해봐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사실 난 빌런을 좋아한다. 실제로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그게 더 본능적이고 솔직하다. 하면서도 재밌고. 요즘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많이 나오고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사회가 많이 보수적이다. 그냥 캐릭터의 다양성인데 살인마 캐릭터는 너무 세다, 여성이 이런 역을 맡기에는 거부감이 든다든지 하는 게 좀 싫었다. 연기를 할 때는 그런 한계 없이 연기하는 내가 즐겁고 보시는 분들도 만족스러우면 성공한 거다.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도 똑같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심플하게 ‘연애’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다. 전종서는 ‘연애’를 어떻게 생각하나.
=약간 색깔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 연애는 다 비슷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까지 징검다리 같은 인연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이유가 그냥 이 사람이 좋아서는 아닌 것 같다. 순수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내주는 것이 무섭거나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연애는 어린 마음으로 내 순결한 진심을 줘도 유일하게 허용된다. 그렇게 다시 한번 꿈을 꿔보고 싶어서 연애가 중독적인 것 같다. 헤어짐은 잔인하고 연애는 주저될 수밖에 없지만 결국 왜 연애를 할 수밖에 없는지, <연애 빠진 로맨스>에 그 이유가 충분히 담겼다고 생각한다.
-지금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을 찍고 있는 걸로 안다.
=어제 끝났다. 은행털이범들이 지구본을 돌리면서 원하는 도시를 찍어서 가명을 정했는데 나는 도쿄를 찍어서 캐릭터 이름이 ‘도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