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센스8>의 형사로 데뷔해 <60일, 지정생존자>의 비서실 행정관, 영화 <뺑반>의 검사, <D.P.>의 군인 등을 소화할 동안 손석구는 슈트와 유니폼을 위해 타고난 배우처럼 보였다. 다부진 인상은 직업 드라마에서 자부심 강한 프로페셔널을, 멜로드라마에서 상대를 흔드는 마성의 남자를 연기할 때 유독 빛났다. 그런데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 편집장의 19금 칼럼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고전하는 잡지사 기자 박우리는 좀 다르다. 정가영 감독이 꿈꾸고, 배우 손석구가 주변에 포진한 여성 동료들의 의견을 구해 완성된 박우리란 남자는 허술한 만큼 귀엽고, 가벼운 말로 상대를 농치면서도 선은 넘지 않는 진중함도 슬쩍 드러낸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특유의 시크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딕션마저 데이팅 앱으로 상대 찾기에 나선 MZ 세대 로코물과 은근한 조화를 이루는 미장센이다. 드라마 <D.P.>와 <지리산>, 주연작 <연애 빠진 로맨스>와 연출작 <언프레임드>, 그리고 <범죄도시2> 촬영까지 종횡무진하며 한해를 꽉 채운 손석구를 만났다.
-그간 연기한 캐릭터들에 비해 한결 귀엽고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출연을 결심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까.
=평소엔 보통 내가 연기할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나 재미에 끌리게 되는데 이번 영화는 오히려 그렇지가 않았다. 툭 까놓고 말해 <연애 빠진 로맨스>는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자러 가고 싶은 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이야기잖나.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 분야에선, 우리나라에서 정가영 감독이 유일무이한 것 같다.
-박우리는 적당히 뻔뻔하면서 순진하기도 한, 로맨틱 코미디가 사랑하는 무해한 남성상의 모범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 동시에 배우의 개성을 입고 은근히 자기 고집이 있는 소설가의 자아도 느껴진다.
=남녀가 서로 성적으로 어필한다는 건 굉장히 사적이고 친밀한 영역의 일인데, 그 중심에 있는 남성 인물이 투박해 보이면 여성 관객이 불편함을 느낄 것 같았다. 감독님의 디렉션 역시 “귀염귀염한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해달라는 거였다. 물론 전종서라는 배우와의 조화도 중요한 요소였다. 종서 배우는 사람 자체가 워낙 멋있고 섹시하다. 감독님이 원한 귀여움과 종서 배우가 가진 성숙한 면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봤다.
-자영과 우리가 처음 식사하는 냉면집, 두 번째로 만나는 선술집에서의 대화 신이 무척 생생하다. 리허설을 많이 한 편인가.
=둘 다 리허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일상적인 대화니까 리허설을 몇번 하면 대사는 충분히 숙지가 됐는데, 냉면집 장면은 의외로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 장면을 전체 촬영 회차 마지막에 찍었다. 감독님과 내가 원했던 게 조금 달랐다. 감독님은 전반적으로 우리가 덜 진지해도 괜찮고 건들건들한 매력이 있길 원했다. 그런데 배우는 자기 캐릭터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잖나. 영화 초반에 우리가 좋아하는 회사 선배와의 에피소드도 아주 진지한 감정으로 해석했고. 냉면집 장면은 그 선배에게 까이고 바로 다음날이라는 설정이어서 일부러 좀더 감정적인 디테일을 집어넣어봤는데, 정가영 감독님은 지난 인연은 그냥 좀 쿨하게 잊으라고 하더라!
-남녀의 차이가 그 자체로 중요한 소재와 정서가 되는 헤테로 로맨스물인 만큼 여성감독, 여성배우와 해석의 결이 다른 부분이 있었겠다.
=맞다. 나 홀로 내 캐릭터의 묘미를 아슬아슬하게 조정해서 어떤 레인지 안에 담아내는 작업이 아니었다. 감독, 배우뿐 아니라 프로듀서님, 그리고 제작사 대표님까지 다 여성이라 그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요소가 아주 많았다. 틈날 때마다 이것저것 물어봤다. 영화 자체는 밝지만 현장에 항상 적당한 긴장감이 있기도 했다.
-일상복이지만 은근히 의상 보는 재미가 있었다. 본인이 소장한 옷들을 많이 활용했다고 들었는데.
=다른 작품을 할 때도 내 옷을 많이 쓰는 편이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게 아닌 일상 드라마일수록 의상에서라도 소소한 재미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옷을 잘 아는 편은 아니어서 패셔니스타인 종서 배우의 의견에 많이 의지했다.
-우리가 네티즌에게 신상이 털리고 댓글 공격을 받는 장면에서 삭발한 모습으로 군대 내무반에 앉아 있는 과거 사진이 등장한다. 실제 사진인가.
=그거 보면서 진짜 많이 웃었다. 내가 감독님에게 주고서 까먹고 있었다. 영화 보면서 순간 ‘뭐야, 내 사진이 왜 저깄어’ 하면서 놀랐지. 2006년 무렵 이라크 자이툰에서 복무할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영화에서 공개된 것보다 훨씬 멋지고 좋은 사진도 많은데….
-<센스8>에서 만난 배두나 배우와 막역하게 지내고, 무명 시절 우정을 쌓은 최희서 배우와의 돈독한 관계도 감독 데뷔작 <언프레임드>까지 함께 이어오고 있다. 이번 촬영장도 그렇고 여성 동료들과 작업하는 것이 유독 편안해 보이는 배우다.
=우정 관계에 있어서 동성과 더 친해지기 쉽고 편하다는 생각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나는 확실히 사람을 대할 때 성별로 구분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는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오니까 친구도 없고 그래서 어머니랑 카페에 가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운전 연수도 어머니에게 받았다. (웃음)
-미술, 영화를 공부하다 농구선수에 도전하고 또 방향을 전환해 연기자가 됐다. 이제 <언프레임드>로 연출에도 뛰어든 셈이다. 한번 결심이 서면 대범하게 일을 추진하는 행동가 타입이다.
=어릴 때의 혈기와는 꽤 달라지긴 했다. 지금은 오히려 직관보다는 경험치에 근거해 스스로 확신을 가져보려고 노력한다. 작품에 임할 때도 리서치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동안 내가 쌓아놓은 아카이브로부터 내린 판단이 맞아떨어질 때, 요즘은 그럴 때 기분이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