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4부부터는 완전히 달라진 세계가 펼쳐진다. 정진수 의장(유아인)이 사라지고 난 뒤 새진리회를 믿는 사람들은 빠르게 늘어나고, 사람들은 지옥의 고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여기 공포에 의해 억압되는 세상에 던져진 한 부부가 있다. 방송국 PD인 배영재(박정민)는 새진리회가 탐탁지 않다. 바쁜 업무 탓에 이제 막 출산한 아내 송소현(원진아)의 곁을 지켜주지 못할 때 죄 없는 아기에게 지옥의 고지가 내려진다. 절망에 좌절할 틈도 없이, 이들 부부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새진리회의 손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미쳐버린 세상 속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박정민 배우는 “부산국제영화제 때 3화까지만 공개됐는데 역할을 상세하게 소개해드릴 수 없어서 아쉬웠다. 부산에서 반응이 좋았는데 내가 나오는 4화 이후로도 괜찮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하다”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송소현 역의 원진아 배우는 “<지옥>은 볼거리고 많고 무서우면서도 재밌는 작품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 보고 난 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질 것이다”이라며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진지한 작품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재미와 의미, 양쪽을 모두 성취한 새로운 시리즈 <지옥>이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두 배우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옥>에 합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박정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19) 촬영 차 태국에 있을 때 연상호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지옥>이란 웹툰 연재를 시작했으니 한번 봐달라는 거였는데, 몇주 후에 다시 연락이 와서 이걸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들 건데 혹시 출연할 생각이 있냐고 물으셨다. 아직 연재가 되지 않은 분량에 나오는 인물인데, 4부 이후의 주인공이고 뒷부분이 더 재밌다며 나를 설득하셨다. 사실 3부까지만 봐도 너무 흥미진진한 내용이라 뒤를 더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물론 나중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전달하시면서 감독님이 내게 사과하셨다. 다음에 꼭 더 좋은 역할을 주겠다고. (웃음) 농담이고, 너무 좋았다. 이 시대의 소시민을 대변하는 평범한 인물이라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진아 나도 뒷부분 내용이 다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1, 2, 3부의 시나리오만 봤다. 내 역할은 있지도 않았지만 거기까지만 읽어도 좋았다. 다른 배우가 캐스팅되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는데, 나중에 내가 맡게 된 송소현이 어떤 캐릭터인지 확인했을 때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박정민 배우가 맡은 배영재 PD는 원작과 성격이 가장 많이 달라졌다. 까칠하게 구시렁거리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다.
박정민 배영재는 새진리회가 지배하는 비틀린 현실과 그들에 좌지우지되는 언론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방송국 PD다. 원치 않게 새진리회와 엮이게 되고 그 안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판타지라고 볼 수 있는 장르 안에서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처럼 그려보고 싶었다. 다만 틀에 박힌 캐릭터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갑자기 사고처럼 닥친 불행 앞에서 믿고 있던 것들이 다 무너질 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름의 방식을 찾아보려 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보여드려야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영재의 아내인 송소현은 이제 막 출산한 상태라 바깥 활동이 거의 없다. 그런 만큼 혼자 무너져내리는 상황을 표현해야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원진아 소현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지옥의 고지가 떨어지면서 혼란과 절망을 겪는 인물이다. 살아온 사연이 극중에 짧게 표현되는데, 소현의 경우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더 큰 아픔을 겪는다. 항상 작품을 찍고 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여전히 공부하고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다만 현장에서 연기할 때만큼은 그 상황에 모든 걸 쏟을 수 있도록 집중하려 노력한다. 송소현은 워낙에 극한상황에 놓인 인물이라 애매한 건 없었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끝없이 감정이 무너져내리는 인물인데 흐름에 맞게 잘 가고 있는지, 조절을 하고 있는지가 고민이었다. 감독님이 그 부분을 잘 잡아주셨다.
원진아 배우의 경우 몇번의 오열하는 장면에서 거의 혼자 다 이끌고 간다.
박정민 맞다. 저랑 감독님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5부에 나오는 원진아 배우의 독백은 앞으로 나올 신인배우들의 레퍼런스가 될 것 같다. 정작 그걸 보고 있는 나는 뭘 해야 하지 싶을 정도로 집중력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가지고 있는 감정이 풍부하고 어떤 환경에 가져다놓아도 순식간에 집중한다. 놀랍고 부럽다.
원진아 데뷔할 때 즈음 연기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다 <파수꾼>을 보면서 꿈을 키웠을 거다. 박정민 선배의 연기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감탄했고 언젠가 꼭 한번 같은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번에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성덕이 된 기분이었다.
<부산행> 때부터 연상호 감독의 현장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걸로 유명하다. 이번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원진아 그 말 그대로다. 이렇게 빨리 끝나는 촬영 현장도 있구나 싶어 놀랐다. 항상 종료시간보다 조금 일찍 끝났던 기억이 있다. 감독님 머릿속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림이 명확했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찍었다. 자세한 디렉팅보다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좋은 것과 아쉬운 것에 대한 리액션을 분명하게 해주셨다. 현장에 있는 가장 좋은 관객이다. 그걸 보면서 신마다 확신을 가지고 연기할 수 있었다.
박정민 <염력>(2017) 때도 워낙에 즐거운 현장, 가고 싶은 현장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기대가 많았다. 애니메이션했던 덕분인지 명확한 비전이 있다.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배우 나름의 표현과 해석을 존중해주신다. 이번에도 대본을 받은 뒤 감독님에게 배영재란 인물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자유롭게 연기했다. 구시렁거리는 대사는 대부분 내가 만들어낸 애드리브인데, 감독님이 나중에 자막팀이 힘들어질 거라며 한 소리 하셨다. (웃음)
박정민 배우는 이번에 <반장선거>란 단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박정민 찍으면서 이 세상 모든 감독님들에게 새삼 존경심이 들었다.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선택하는 만큼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자리다. 그런데 현장에서 항상 모두를 유쾌하게 만들어주시는 걸 보면 정말 그릇이 크신 분이다.
지옥의 사자들뿐 아니라 여러 특수효과들이 들어간 현장이다.
원진아 내내 안고 있는 아기, 튼튼이는 고퀄리티의 더미다. 생긴 것도 약간 박정민 배우를 닮았다. 어쩌면 아기와 가장 많은 연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장에서도 아기를 건네받을 때 다들 소품으로 대하지 않고 살아 있는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대했다. 솜털도 있고 숨도 쉰다. 함께 호흡하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박정민 지옥의 사자들은 당연히 CG인데, 텔레토비 같은 쫄쫄이 옷을 뒤집어쓰고 함께 연기했다. 안무가 분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냥 휘적거리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그로테스크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1~3부가 신의 의도와 인간의 죄, 지옥의 유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4부부터는 선택의 문제에 대한 고민들이 이어진다.
원진아 1~3부가 혼란과 방황의 세계였다면 4~6부는 이미 비틀린 신념에 삼켜진 안쓰럽고 씁쓸한 세계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자신의 신념에서 오는 게 아니라 다수의 공포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 다수의 목소리가 정의인 것처럼 덧씌워진 세상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세계관이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론 그리 먼 이야기 같지 않다. 현실을 새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충격효과가 있다. 소현의 대사 중에 “선택권이 있나요”가 있다. 누군가 던져준 양자택일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정민 인간의 그릇된 신념이 가져오는 비극, 그 반대편에서 그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다. 다수의 맹목적인 행동들로 인한 피해자는 결국 평범한 이들이다. 선택이라기보단 낭떠러지 앞에서 할 수 있는 제한적인 운신의 폭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소현 역에 좋은 대사가 참 많다. 나는 별로 없어서 내가 대사를 막 만들고 편집당하고 그랬는데. 이 자리를 빌려 넷플릭스 자막팀에 사과드린다. (웃음)
배우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선택을 받기도 하는 게 일상인 일인데, 이제까지 했던 선택 중에 본인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선택이 있다면.
원진아 막막했지만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뭐가 되었든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결국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배우라고 불러주는 상황 자체가 감사하다. 그때 배우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박정민 원래 영화 전공을 하다가 연기를 한 케이스다. 당시 1년 동안 엄청 갈팡질팡했다. 연기를 하겠다는 마음은 확고했지만 그걸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과를 옮길까? 자퇴하고 극단을 들어갈까? 아직도 그때의 선택이 옳았던 건지에 대한 판단은 안 선다. 다만 그 기간에 내가 품었던 수많은 마음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