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버호벤 감독은 베네데타를 <원초적 본능>(1992), <쇼걸>(1995), <블랙북>(2006) 그리고 <엘르>(2016) 속 여자주인공의 먼 친척쯤으로 봐도 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버호벤이 비춘 여성 캐릭터들은 예로부터 대담했는데, 섹슈얼리티를 드러내 목적을 달성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했다. 그들은 오래도록 성적인 폭력에도 노출돼왔다. 그럼에도 짚어야 할 맥락은 버호벤 영화의 여성들이 결코 나약하게 감내하는 전개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험악한 세계에서 살아남기라는 폴 버호벤의 유구한 테마를 육화한 존재로, 자신을 찌른 칼을 다시 뽑아 들어 휘둘러보려는 개인이자 성적 주체로서 전진했다.
아마도 버호벤은 매춘으로 생계를 잇던 <캐티 티펠>(1975), 가슴을 내놓고 춤추는 <쇼걸>도 “원래 사는 게 거지 같다”는 노미(<쇼걸>)의 지각을 내면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테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성적 욕구를 표출하거나 가장하면서 남성들을 유린한다. 여성들이 반페미니즘적 행보로 끝내 생존하는 서사는 <아그네스의 피>(1985), <블랙북>, <엘르>에 이르러 교묘하게 비틀린다. 이 작품들에서 버호벤은 비자발적 또는 반강제적 섹스를 경험한 여자가 주도권을 탈환하는 여정을 제시한다. 아그네스(<아그네스의 피>)와 레이첼(<블랙북>)은 전쟁에서 적에 해당하는 남성과의 관계를 욕망하고, 미셸(<엘르>)은 강간범과의 재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남자들의 말로를 기억한다면 버호벤의 여성 인식이 유해하다고 가정해 손가락질하기 어려울 것이다. 금기의 경계 위에서 줄 타던 여성들은 본인이나 아군의 손에서 숨통이 끊기는 남자들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포스맨>(1983), <원초적 본능>에서도 여성은 언젠간 남자주인공을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 기꺼이 취급되지 않았나. 스릴러 작가이기도 했던 살인 용의자 캐서린(<원초적 본능>)도 자신을 취조하던 형사와 밤을 보낸 후 토로한다. “오르가슴 좀 느꼈다고 내 얘기를 다 하진 않아요. 내가 허락한 만큼만 알게 될 거예요.” 어쩌면 버호벤의 카메라는 늘 이야기 속 여자들이 말하고 싶은 만큼 들어왔고, 보이고 싶은 대로 찍어왔다. 그 결과물이 세간에서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도 감독의 입장은 확고하지 않을까. 그 고집의 정수는 <베네데타>에서 만발했고, 절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