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가장 큰 적이야.” <베네데타>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은 영화 초반 슬며시 고개를 든다. 수녀원에 갓 입성한 어린 베네데타(엘레나 플론카)가 유니폼의 불편한 옷감을 지적하자 수녀원장 펠리시타(샬럿 램플링)가 건네는, 옷을 편히 입으려 하지 말라는 충고와 더불어 말이다. 하나 어른이 된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의 몸에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의 몸에 동료 수녀와의 사랑은 쾌락을, 예수님의 환영은 고통을 새긴다. 몸은 그 자체로 신성과 악마성의 증거가 된다. 17세기에 실존한 한 수녀의 삶은 역사학자 주디스 C. 브라운의 책 <수녀원 스캔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으로 알려져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로 재탄생했다. 책이 100쪽에 가까운 주해와 증언들을 첨부해가며 당대 가톨릭 사회의 시스템과 동성애 인식을 해부해 베네데타를 기록했다면, 영화는 성녀이자 레즈비언이었던 베네데타의 다중성을 골고루 묘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폴 버호벤은 과연 <로보캅> <원초적 본능> <쇼걸> <스타쉽 트루퍼스> 그리고 <엘르>의 감독답게 이번에도 험한 세상의 문제적 인물을 탁월하게 바로 세웠다. 베네데타는 누구이고 그를 사로잡은 믿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베네데타>가 육체와 신앙을 엮는 방식을 되돌아보았다. 그 길목에서 만난 버호벤 영화 속 남다른 여성 캐릭터들의 계보도 덧붙인다.
믿는 자에겐 우연도 사건이 된다. 어린 베네데타가 수녀원에 입회하던 날, 그는 두번의 신비를 경험한다. 낮. 베네데타와 부모는 페샤로 향하다 도적떼를 만난다. 어머니가 목걸이를 빼앗기자 딸은 성모마리아가 가만있지 않으리라 으름장을 놓는다. 하늘은 소녀에게 응답이라도 하듯 새똥을 떨어뜨린다. 봉변을 당한 강도는 상황을 못내 비웃으며 목걸이를 돌려준다. 밤. 부모가 지참금을 납부하고 떠나자 베네데타는 앞으로의 안녕을 기도하고자 복도의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상은 아이에게로 쏟아져 머리를 짓누른다. 사고는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경이롭게 다뤄진다. 소란을 잠재운 수녀원장 펠리시타는 말한다. “갑작스러운 기적은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야.”
육체라는 증거와 두개의 진실
베네데타가 성인이 되기 전 일어난 두 에피소드는 두개의 추론을 낳는다. 이 사람에겐 신이 함께한다. 혹은 이 사람은 그저 신이 함께하길 원한다. 둘 중 무엇을 택해 영화를 볼 것이냐는 꽤 중대한 고민 같지만 무얼 골라도 반문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18년 후’라는 자막을 띄우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베네데타의 환상과 현실을 유연하게 오가며 베네데타를 성녀와 협잡꾼의 왕좌에 번갈아 앉히기 때문이다. 베네데타는 가정폭력을 피해 수녀원으로 도망친 바르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의 유혹을 받아들여 그와 섹스하는 사이가 되고도 계속해서 예수의 환영을 본다. 신의 부르심을 인정받아 수녀원장 자리에 오른 베네데타는 독방에서 바르톨로메아와 한껏 대담해진다. 과연 ‘주님의 신부’가 되겠다고 한 여성은 예수의 부름을 받은 것인가, 모든 걸 조종해 욕망을 실천한 것인가.
<베네데타>는 인물의 육체를 증거로 답안을 작성해보라고 주문한다. 고통의 터전이자 쾌락의 본거지인 그의 몸은 신성과 악마성 양쪽을 대변한다. 베네데타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게 하라”고 명하는 예수를 만나고, 꼭 예수처럼 두 손발에 성흔을 갖게 된다. 그가 야곱 수녀의 가슴 흉터에 감응하며 신이 말씀을 전하는 다양한 방법에 눈뜬 순간을 반추하지 않더라도, 자해의 가능성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후반부에 바르톨로메아가 들이미는 물증에 의해 재차 강조된다. 상처와 성흔의 등식만큼이나 육체적 고통을 신의 뜻에 비례해 보게 만드는 장치는 질병이다. 베네데타의 부정이 폭로된 후 페샤에는 흑사병의 불안이 커지는데, 이는 외지의 교황 대사를 불러들여 최종 심판을 기다리는 일과 겹치며 신이 가하는 엄벌의 전염성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의 엔딩은 베네데타와 페샤에 내려진 일종의 판결이 신의 의중과 맺는 관련성을 은근히 내세워 보인다. 베네데타의 복귀가 신의 가 호를 동반했을 수 있다고 암시하면서.
“두개의 진실은 공존하기에 영화는 무엇이 진정한 진실인지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은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폴 버호벤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을 거론하며 <베네데타>에 전제된 양면성을 못박았다.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샤론 스톤)은 살인자인가. <토탈 리콜>에서 퀘이드(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겪는 일은 꿈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에, “우리는 모른다”라는 게 버호벤의 답이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무지의 지에 도달했다며 팔짱 끼기보다 당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가 거기에 있으니 그것을 취할지 말지 선택하라고 눈짓을 보내며 퇴장하는 쪽에 가까운 작가다. <원초적 본능>과 <토탈 리콜>이 그러했듯, <베네데타>도 관객이 참조할 신마다 그의 어떤 판단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는 근거들을 배치할 뿐이다. 다만 이 재료들은 서사 내부에서도 작동한다. 베네데타 또한 자신이 보고 싶은 예수를 봤고, 듣고 싶은 말씀만 들었고, 그러므로 안고 싶은 여자를 안았다는 추측은 오랜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결말에 이르러 가장 유력한 보기로 남는다.
“수치심이란 없어”
폴 버호벤이 묘사한 실존 인물 베네데타는 또 한명의 네덜란드 출생 작가가 쓴 소설 내 실존 인물을 연상시킨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몰락하는 자>에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주요 캐릭터로 등장시키며 그의 염원을 옮긴다. “이상적인 피아노 연주자는 피아노이기를 원하는 자야, 나조차도 매일 잠에서 깨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는 인간이 아닌 스타인웨이가 되고 싶다고, 오로지 스타인웨이가 되고 싶다고.” 베네데타에게 생긴 일이 의도에 따른 조작일 때 그가 할 수 있는 변명도 비슷하다. (여자와 섹스를 해도) 이상적인 수도자로 남기 위해 신적 존재가 되길 바랐다고. 예수를 섬기는 인간이 아닌 예수가 되고 싶었다고. 이때 예수는 베네데타가 보는 환시 속 성령이자 고행으로 하나된 파트너. “베네데타는 바르톨로메아와 성적인 관계를 허락하는 예수를 꿈꾼 것이 아닐까.” 감독도 곱씹었다. 연인을 앞에 두고 자위하며 “주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수치심이란 없다”고 말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보편적인 사랑”을 알게 됐다고 진술하는 베네데타는 성스럽게 이기적이다.
버호벤 영화 속 여자들이 품어온 내면의 골짜기가 <베네데타> 속 17세기 종교인 여성들의 심연으로 흘러들어온 걸까. 베네데타는 <엘르>의 미셸(이자벨 위페르)처럼, 현대의 관점에서 소수자이자 피해자로 읽힐 수 있는 여지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사건을 주도한다. 그런 그를 사랑한 바르톨로메아는 <블랙북>의 레이첼(카리서 판 하우턴)이 그랬듯 애정의 무게에 괘념치 않고 생존을 향해 나아간다. 스승과 제자로 살다 정치적 숙적이 되어버린 펠리시타와 베네데타의 관계마저 궁극엔 <쇼걸>의 병문안 신처럼 기묘한 연대로 마감한다. 탈취와 보복으로 얼룩졌던 둘 사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한때 야심을 키운 여자들의 내통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이 나눈 최후의 귓속말은 펠리시타의 결정적 행동을 촉발하지만 이전에 베네데타가 올린 몇번의 소리 없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고요히 흩어진다. 빈칸을 채우는 건 관객의 몫이지만 영화의 침묵에도 이유는 있다. 바라서는 안되는 것을 바랄 때,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을 의심하게 되고, 뱉어서는 안되는 말을 뱉게 된다. 성모상을 깎아 만든 딜도를 신성모독으로 규정할 이들이 참지 못할 언사 같은 것을. 감독은 거추장스러운 설명 대신 깔끔한 공백으로 제안한다. 규율 아래 다퉈온 신구의 대립을 매듭짓는 최선은 금기에의 공감이었을지 모른다고(“펠리시타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마 신앙인이 아니었다고 본다”라는 버호벤의 코멘트는 강력한 힌트다). 그것은 폴 버호벤 필모그래피의 여자들이 세상과 소통해온 방식이자 서로를 인정해온 까닭과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