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선거>
감독 박정민 / 출연 김담호, 강지석, 박효은, 박승준
동물 또는 속물. 교실의 주인들은 종종 손쉽게 양쪽을 오간다. 사회적 동물의 생존 본능이라면 귀엽고 당연해 보이고, 속된 어른들의 세계를 섣불리 모방하는 것이라면 조금 안타까운 그런 광경. 아이일 때 우리는 모두 그 정글의 일원이었고 각자 조금씩 살이 뜯기고 피 흘리는 채로 살아남았다. 생애 처음 선거 정치판에 입문하게 된 외톨이 정인호(김담호)의 외롭고 이상한 며칠을 그린 <반장선거> 역시 꽤나 새빨갛고 잔혹한 현실을 그렸다. 대선 정국을 방불케 하는 정파 갈등과 네거티브, 권모술수가 도사리는 5학년 2반에는 유장원(강지석)과 주선영(박효은)의 양자 대결 구도가 한창이다. 차기 전교회장을 목표로, 우선 학급반장 타이틀이 절실한 장원은 반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아이 인호를 끌어들여 선거판의 미끼로 삼는다.
러닝타임 24분. ‘잘나가는 패거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어리숙한 애’의 흔한 학교 성장담을 박정민은 힙합의 비트에 맞춰 자기 방식대로 쪼개고 뒤집는다. 출마 선언-투표-개표로 이어지는 세개의 메인 이벤트와, 학교 창고에서 몰래 투표함을 조작하는 정인호의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리드미컬하게 엮어나간 끝에 <반장선거>가 조직한 형상은 미덥고 날카롭다. 90년대 MTV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리시한 터치로 패거리들의 권력 대결을 풍자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의 진짜 관심은 ‘대세’에 가려졌던 말없고 속 깊은 아이들의 자리다. 좋은 이야기의 역할이 쉽게 변색되는 진실의 거울을 부단히 닦아 비추는 것이라면, <반장선거>는 그 일을 짐짓 흥얼거리듯 중얼거리듯 해낸다. 물론 여기서 멈춘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처럼 맺어질 만한 순간에 박정민은 다시 무심히 돌아서서 차가운 세상을 향해 걸어간다. 과연 <파수꾼>이 낳은 스타답다.
<재방송>
감독 손석구 / 출연 임성재, 변중희, 오민애, 최희진, 김자영
경험한 바가 아니고서는 건져올리기 힘든 것들, 우리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사의 핍진성으로 그득한 <재방송>은 어쩌면 <언프레임드>에서 가장 의외의 영화일지 모른다. 배우 손석구의 세련된 이미지는 출처 불명의 빨간 배낭 안으로 반찬통을 꾹꾹 눌러담는 이모(변중희)의 손길과 함께 잠시 봉인된다. 초로의 이모와 다 늙은 조카 수인(임성재)은 머리를 맞대고 어색한 데 없이 밥을 먹은 뒤, 재방송되는 드라마 한편을 보며 한담 나누는 사이다. 이날 수인이 엄마에게 부탁받은 임무는 이모의 외손자 성빈의 결혼식까지 그녀를 무사히 에스코트하는 일. <재방송>은 엄마의 언니를 혼자 담당하게 된 조카와, 손주 결혼식 가는 일을 자꾸만 회피하는 것 같은 할머니의 삶을 천천히 지켜보며 그 뒷편에 숨은 복잡한 뉘앙스들을 스멀스멀 피워올린다. 거기엔 집안 손주, 조카들에게 부지런히 밥을 해먹이고 손에 요구르트를 쥐어주며 키워온 이모의 지난 시절이, 그런 이모를 뒤로하고 먼저 떠난 외동딸의 역사가 있다. 세상의 모든 가족에겐 저마다 말 못할 기구한 사연이 있을 터, 감독 손석구는 그 구구절절한 일화들을 ‘결혼식 가는 길’에 담백하고 차근하게 압축해낸다. 한여름에 한복을 둘러입은 여자와 보따리가방을 멘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걷는 동안, 재방송처럼 반복될 상실의 슬픔에 관한 교감은 부지불식간에 단단한 유대를 맺는다. 퉁명하고 무뚝뚝한 남자에게 양산, 반찬 보따리, 요구르트와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쥐어주고 따뜻한 감정의 도구로 활용하는 강력한 전략도 결국 통한다. 임성재, 변중희의 지긋한 콤비 플레이에 오민애, 최희진, 김자영 등 독립영화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배우들이 곳곳에 등장해 물샐 틈 없는 연기력을 빛낸다. <반디>
<반디>
감독 최희서 / 출연 박소이, 최희서, 조경숙, 신현수
<재방송>에 이어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그리는 <반디>에는 남편을 잃고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여자 소영(최희서)이 나온다. 죽은 남편 원석(신현수)이 유년기를 보냈던 아파트는 이제 재개발을 앞두고 있고 남편의 엄마(조경숙)도 곧 그곳을 떠날 참이다. 오랜만에 어린 딸 반디(박소이)와 옛집을 찾은 소영은 남편이 옛날에 들려주었던 꿈같은 기억을 떠올린다. 아파트 뒷산에서 유리병에 반딧불이를 모았다는 이야기. 도시에 무슨 반딧불이냐며 믿지 않았던 소영에겐 그보다 더 믿기 힘든 남편의 이른 죽음이 벌어졌고, 그사이 딸 반디가 자라났다. 말을 더듬는 반디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지만 원석의 방 안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에는 더없이 쾌활하다. 더 늦기 전에 아빠의 부재를 딸에게 알리려 하는 여자의 이야기인 <반디>는 어른의 근심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서사가 도착하는 곳은 어른이 미처 모두 헤아리지 못했던 아이의 드넓은 마음이다. 어떻게 상처 없이도 죽음과 부재를 알릴 수 있을지 곰곰이 고쳐 생각하던 소영은 놀랍게도 반디로부터 위로받는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는 아이들의 순수, 그리고 기발한 언어에 탄복한 작가 최희서는 일찍이 보호의 대상에게 보호자가 되레 치유받는 구도의 모녀 드라마를 구상하다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배우 박소이와 호흡한 뒤 이야기를 끝마칠 동력을 얻었다. 슬픔에 민감한 눈, 다정하고 단단한 손길을 두루 겸비한 감독 최희서는 배우의 눈물과 미소를 정확히 담아내는 클로즈업숏을 적시에 활용해 힘 있는 화면으로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블루 해피니스>
감독 이제훈 출연 정해인, 김다예, 이동휘, 탕준상, 표예진
<언프레임드>는 배우 이제훈이 양경모 감독, 김유경 프로듀서와 힘을 합쳐 설립한 제작사 하드컷과 왓챠가 기획한 단편 옴니버스 프로젝트다. 제작자로서 앞선 작품들의 완성도와 연결성을 고민했을 이제훈이 택한 이야기 <블루 해피니스>는 동시대 청춘의 절망과 낭만에 시의적절하게 안착하는 시도로서 옴니버스 영화의 문을 닫는다. 어느 흔한 빌라촌, 보증금을 겨우 마련해 반지하에 단란한 방을 꾸린 가난한 연인이 있다. 여자가 직장에서 일할 동안 남자는 운전기사 일과 취업 준비를 병행하며 고단하게 하루를 보낸다. 이 영화에서 불행의 첫 단추는 희망 때문에 꿰어진다.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카메라를 팔았던 남자친구 찬영(정해인)에게 지은(김다예)이 다시 카메라를 선물하고, 찬영은 카메라를 들고 주변 사람들을 찍다가 우연히 학창 시절 친구 승민(이동휘)을 만나게 된 것. 퇴사 후 매월 연봉을 번다는 ‘투자자’ 승민의 추천으로 주식에 입문하고 순식간에 보증금과 생활비까지 몰아넣은 찬영의 미래를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주가가 잠시 뛰었다 폭락하는 짧은 며칠 새, 찬영의 삶도 따뜻한 파랑과 절망의 파랑을 오간다. 단란했던 연인의 행복이 가난이라는 불행, 그로 인한 절박하고 미숙한 실수에 의해 손쉽게 깨어진다는 고전적 서사는 주식 열풍에 들썩이는 최신의 한국 풍경과 겹쳐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감독 이제훈은 차창 유리를 한겹의 막 삼아 정해인의 얼굴이 절망에 휩싸이는 순간에 차분히 거리를 둔다. 배우가 가진 순진하고 성실한 연인의 얼굴은 그것이 돈 때문에 일그러질 때 한결 잔혹한 감상을 낳는다.
감독들이 꼽은 ‘이 장면’
박정민 <반장선거>는 아이들이 투표하는 모습을 기반으로 시나리오가 시작되었고 실제 현장에서는 뮤직비디오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한결 촬영감독이 무척 훌륭하게 내가 그려왔던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여기에 마미손 음악감독이 합류해 편집 과정도 즐거웠다.
손석구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 딸을 그리워하는 이모의 얼굴을 모니터링할 때 울컥했다. 상황에 집중한 변중희 선생님의 표정은 온전한 진짜였고, 돌아가신 나의 가족이 생각나게 만드셨다. 연기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때만큼 위대한 영화적 순간은 없다고 본다.
최희서 죽은 원석의 얼굴을 허투루 많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오프닝 신에서도 클로즈업숏이나 바스트숏이 없었던 이유다. 소영의 임신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신현수 배우의 정면 클로즈업숏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딱 한번 썼다.
이제훈 후반부, 심장이 내려앉는 절망을 느끼고 있는 정해인 배우의 모습을 차창 너머에서 프레이밍할 때 그 감정이 내 몸에 전달되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연출자로서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모습에 마구마구 신났다. 승민과 통화 중인 찬영의 목소리는 내가 직접 통화하면서 연기했는데, 이 또한 재미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