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아워 바디>로 본인 결혼식 전날 긴 인터뷰를 하고 <씨네21>과는 오랜만이다.
그때 김혜리 기자님과 5시간 이야기했다. 내일이 결혼식이니까 집에 가긴 해야 하는데, 너무너무 재밌어서 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더라. (웃음)
<박열>(2017)로 대종상 시상식에서 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받고 두 번째 장편영화 주연작 <아워 바디>(2018)를 개봉한 시기였으니 배우로서 선명한 도약의 순간이자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시기였을 터다. 이번엔 2년 만에 <반디>의 감독이라는 새 직함을 갖고 왔다.
<아워 바디> 개봉과 결혼이 맞물렸던 그 시기는 내가 봐도 인생에서 중요한 때였다. 작업 시기로 보면 <아워 바디>는 2시간짜리 장편영화의 주연을 맡은 첫 번째 영화였으니까. 주인공인 또래 한국인 여성을 연기한 것도, 실제 내 나이와 캐릭터의 나이가 비슷하게 겹치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아워 바디> 때 동세대 감독, 촬영감독과 작업한 경험이 각별해서 <반디>의 촬영감독을 정할 때도 긴 고민이 필요 없었다. 이성은 촬영감독(<들꽃> <아워 바디> <버티고>)은 나와 한살 차이가 난다. 이번에 조심스레 시나리오를 보냈더니 하루 정도 지나서 엄청난 장문의 분석글을 보내주었다. 좋은 장면, 아쉬운 장면까지 아주 솔직하고 세세하게. (웃음) 덕분에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언프레임드>는 올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관객과 만났다. 첫 관객과의 대화(GV)에서 박소이 배우는 연예계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최희서를 꼽았다.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엄마와 딸을 연기할 땐 겹치는 촬영이 2회차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이 친구를 내 딸로 생각하고 짧은 시간 안에 큰 감정의 격랑을 만들어내야 하다보니 정말로 친해지지 않으면 연기하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태국 현지 사정상 대기가 길다보니 2주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게다가 막상 함께 있어보니 소이와 노는 게 너무 재밌었다. (웃음) 소이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서 여자 셋이서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아역배우의 보호자는 현장에 늘 동행하니 스탭만큼 자주 보는 사이이기도 한데, 정작 배우와 친분이 있다는 사례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소이 어머니는 소이에게 안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고, 아이가 무언가에 호기심에 생겨서 꽂혔을 때 그걸 충분히 파고들 수 있게끔 기다려준다. 예를 들어 소이가 팔찌 만들기에 집중하느라 “밥은 나중에 먹을게요”라고 하면 그런 예외를 허용해준다. 나는 그게 소이의 연기 생활이나 성격 형성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반디>에도 소이와 실제 어머니의 모녀 관계를 보고 내가 느낀 긍정적인 면들이 반영됐다.
감독 자신도 건강한 모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나.
엄마와 나의 관계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도 나를 꽤나 자유롭게 키워주셨다.
<반디> 시놉시스는 처음 어떤 맥락 속에서 구상했나.
엄마가 아이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처음 이야기해주는 내용인데, 그 과정에서 엄마에게 위로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던 아이가 도리어 어른을 위로하는 그런 순간을 보고 싶었다. 소영에게는 정말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구상한 지는 6~7년 정도 됐고 본격적으로 쓴 건 3년 전쯤이다. 처음엔 쓰다 말았다. 그사이 작품에서 누군가의 보호자, 싱글맘 등을 연기하면서 배우로서의 내 경험과 30대 여성으로서 내 삶의 경험들이 합쳐졌고, <반디> 시나리오를 다시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왓챠 숏필름 프로젝트 제안을 받고 곧장 이 작업을 끝내야지 하는 결심 같은 것이 섰다.
박소이 배우와의 관계가 오래된 아이디어를 마무리 짓는 데 결정적인 영감을 준 것 같다.
소이와 이야기하다보면 가끔 본질을 툭 하고 건드릴 때가 있다. 허례허식 다 벗겨내고 알맹이만 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놀란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 카펫에 선 두 사람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플래시 속을 걸어가면서 박소이 배우에게 카메라 위치와 포즈를 한참 꼼꼼히 가이드해주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그대로 잡혔다.
하하하. 나중에 개막식을 봤는데 너무 웃긴 거다. 혼자 아주 바쁘고 난리더라고. 사진으로 보면 티가 안 나지만 영상에선 내가 계속 이쪽저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금은 여기 봐야 해, 이번엔 저쪽을 보면 돼” 하는 식으로 분주하다.
멋진 콤비 플레이였다. <아워 바디> 때도 레드 카펫에서 한가람 감독과 안지혜 배우를 리드했다. 프레임 바깥에서 묻어나는 최희서의 특질 중 하나로 그런 적극성과 개방성이 좋다. 일종의 리더십이기도 한데, 어찌 보면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배우, 특히 여성배우에게 전형적으로 요구하는 덕목은 아니다.
타고난 성격도 있고 장녀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권장하는 외국 문화에서 자라온 영향도 있을 터다. 대학교 시절이 생각나는데, 보통 강의 끝날 때쯤엔 다들 수업을 일찍 끝내고 싶어서 질문을 안 하는 분위기잖나. 나는 굳이 손을 드는 쪽이었다. 친구들도 내 성향을 아니까 ‘쟤 또 시작이다’ 하고, 나는 나대로 ‘빨리 할게~’라고 응수하고. (웃음)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를 할 때나 혼자서 오디션 보러 다닐 때 배우 생활의 근력이 되어준 성향이 아닐까 싶다.
대학 연기 워크숍에서도 두번 정도 진행을 맡은 적 있다. 그 당시 3~4살 어린 후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더 적극적으로 리드할 수밖에 없었다. 워크숍 이름도 ‘능동’이었다. 각자 연기할 작품과 파트너를 정해주고 필요하다면 결과물에 코멘트까지 해주는 일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연출이었고 리더의 역할이었다. 직업 배우로서는 항상 감독의 지시에 충실하려 하지만 그래도 꽤나 의견을 내는 배우쪽에 속하는 것 같다.
올해 개봉한 이시이 유야 감독의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도 배우이면서 인물 조감도의 역량까지 나눠 가진 경우다. 시나리오의 한글 통역을 지원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오다기리 조, 이케마쓰 소스케, 김예은, 김민재 배우를 잇는 교각 역할을 했다.
한국과 일본 배우들이 서로 소통이 안돼 불편함이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지면 그걸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서다. 내 눈앞에서 동료 두 사람이 서로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 그럼 당연히 나서서 뭐라도 해야지! (웃음)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걸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출연 중에 <반디>를 함께 찍었다. 스케줄 운용이 쉽지 않았을 듯한데.
촬영 중간중간 콘티 회의하고 완고 내고, <반디> 촬영 마치고 바로 이동해서 드라마 촬영에 가는 식으로 4주 정도를 보냈다. 스케줄로만 보면 소영 역에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박소이 배우와 친한 사람만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우간 친밀도가 연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던 이유는 상대가 어린이 배우여서인가.
카메라가 친한 사람 둘이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찍는 것과 어제 만난 두 사람이 밥 먹고 있는 모습을 찍는 것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뛰어난 선배님들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상대 배우와 어느 정도 친밀도가 쌓이고 그에 대해 내가 어느 정도 알겠다는 마음이 들 때에야 투숏에서 느낌이 나온다. <반디>에는 나와 소이가 숲속에서 손잡고 걸어가는 중요한 뒷모습이 있다. 언젠가 소이와 소이 어머니가 화장실에 손잡고 가는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다가 떠올린 장면이다. 어쩜 저렇게 둘이 닮았을까, 꼭 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녀뿐 아니라 소영과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돈독하게 다뤄진다.
내게 <반디>는 세 여자의 이야기다. 소영과 반디는 물론 원석의 어머니 또한 수직적인 관계 구도를 이루지 않았으면 했다. 소영과 엄마는 원석을 잃은 아픔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다른 한쪽엔 원석을 굉장히 궁금해하고 만나고 싶은 대상으로 생각하는 반디가 있는 거다.
침착하고 차분한 성정인 <반디>의 소영과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패션그룹 맏딸, 셀러브리티 황치숙은 거의 극단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반디>의 소영을 연기하다가 몇 시간 뒤에 이동해서 황치숙을 연기하려니 정말 자아분열이 오겠더라. (웃음) 갑자기 화려하게 차려입고 옆에서 분장 스탭이 립스틱을 발라주는데, 내가 여기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반디>의 연출자로서 주연을 맡은 배우 최희서에 대해 평가하자면.
좀 아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배우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내 연기가 차선이 되는 경험을 해봤다. 최우선은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스스로 나는 배우구나 싶은 순간도 있었는데, 카메라 앞에 있을 때 너무 편한 거다. 연기할 때 마음이 가장 편하고 카메라 뒤로 가면 신경 쓸 게 많으니 고단했다. 여러 사람을 아우르고 그에 걸맞은 선택과 결과를 내야 하는 감독의 일이 정말 어려운 것임을 느꼈다.
주연배우와 감독을 겸하는 경험의 남다름도 있었겠다.
눈앞에서 내가 상대 배우로서 대사를 하는 상황에선 모니터 앞에 있지 않아도 배우의 연기를 가장 가까이서 눈으로 보는 셈이 되니까 그걸 믿었다. 또 그만큼 촬영감독님에게도 의지했다. 촬영감독님이 좋다면 추가로 모니터를 안 하고 오케이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밝혔다. 장편영화에 대한 계획도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구상 중인가.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게 영화 작업이라서 함부로 쉽게 하고 싶다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모든 걸 다 제쳐놓고 그냥 나의 욕망만을 말하자면 당연히 또 하고 싶다. 그레타 거윅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 (웃음) 왜냐하면, 내가 보기엔 아직도 여성 서사가 턱없이 부족하다. 어떤 장르, 어떤 이야길 하든 내 다음 영화도 여자가 주인공일 것이다.
배우로서 요즘 제안받는 여성 캐릭터의 변화나 경향이 있다면.
내게 주어지는 여성 캐릭터의 결은 굉장히 강인한 여성 또는 어마어마한 인생의 고충을 겪는 여성, 둘로 나뉘는 것 같다. 좀 무난한 삶을 살고 있는 편안한 여성 역할도 하고 싶다. (웃음) 그래서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황치숙 역이 재밌었다. 나와 달라서 어렵긴 했지만, 매번 색다른 걸 할 때 재미를 느낀다.
앞으로 감독으로서 배우를 어떻게 대하고 싶나. 지금보다 여성배우에게 더 척박한 환경에서 혼자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신인 시절에 무명 여성배우가 겪는 성차별적 환경을 몸소 겪었기에 더 궁금한 지점이다.
사랑을 주고 싶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매력을 알아봐주고 칭찬하는 연출자가 되고 싶다. 배우들 중에는 나이, 외모, 성 지향성 등에 따라서… (갑자기 눈물이 고여) 너무 많은 평가에 노출되어 있는데 자기 배우를 사랑해주고 그걸 정확하고 풍성히 표현해주는 감독님들로부터 힘을 얻는 경우가 많다.
블로그에 틈틈이 써오던 일기가 올해 들어서는 조금 뜸하다. 바쁜 탓일까.
실은 곧 책을 낸다. 어제 원고 1차 마감을 끝낸 상태이고 발간은 내년 2~3월쯤이 될 것 같다. 운 좋게 평소 좋아하던 서효인 작가님의 출판사에서 출판하게 됐다.
연기, 연출, 그리고 글쓰기까지 삶에 동력이 되어줄 열정의 뿌리가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오늘 새삼 느낀다. 그중에서도 글쓰기로부터 얻는 힘은 무엇일까, 시나리오든 에세이든.
글쓰는 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블로그도 순전히 좋아서 시작한 건데 내게 많은 것들을 되돌려주는 행위다. 현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발산하고 피폐해졌을 때 글을 쓰면서 치유하고 명상한다. 글쓰기만이 주는 굉장히 평온한 상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