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잘 알면 엿도 더 잘 먹일 수 있다. 대기업 돈세탁을 전문으로 하던 전직 회계사 황동주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해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국세청에 입성한다. 공무원 하면 떠올리는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뻔뻔하고 독한 추진력으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황동주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등에서 보여준 임시완의 ‘얄밉게 약 올리는’ 얼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제대 후 쉬지 않고 여섯 작품을 내리 촬영했다는 임시완을 만났다.
-<트레이서>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미생>의 CP(책임 프로듀서)였던 이찬호 스튜디오 웨이브 대표와의 인연 때문인가.
=<미생>이 나올 때만 해도 tvN 드라마는 시작 단계에 있었다. 그때처럼 선구자 역할을 웨이브에서도 잘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국세청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조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글을 보면 느껴지는 부분이니까.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사명감에 반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세청은 행정고시 5급 재경직을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원래 회계사였으니까 CPA를 합격했을 테고. 황동주는 젊은 나이에 어려운 시험에 두번이나 합격했다.
=맞다. 엄청난 수재가 맞다. 그런데 본인도 자신아 수재인 걸 알아 ‘싸가지’도 없다. (웃음)
-공무원이란 직업은 정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이 있는데, 캐릭터 접근을 완전히 다르게 한 것 같다.
=실제 국세청을 탐방하고 전직 직원들을 인터뷰하며 사무적인 일을 할 때 말투라든지 궁금한 것들을 여쭤봤다. 그런데 결국 국세청도 사람 사는 곳이라 사람마다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답을 받았다. 그 말에 힌트를 얻어 ‘국세청’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식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채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상대를 약 올리는 연기를 굉장히 잘하더라.
=처음에는 그렇게 연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 깐죽거리는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려면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한다. 솔직히 자신도 없었고. 그런데 대본 리딩날 합을 맞춰보니 원래 국세청에 있었던 분들과 싸울 때 톤을 너무 진지하게 가져가면 동주가 약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머리가 아주 좋은 수재가 수재처럼 이야기를 하면 캐릭터가 뻔해질 수 있다. 대화가 안 통하는 어린 애들이랑 싸우는 느낌을 주면 오히려 상대쪽이 더 미워 보인다. 그래서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 컨셉으로, 요즘 신세대가 할 법한 말이나 행동, 사고방식에 중점을 두고 색깔을 만들어갔다.
-<90년생이 온다> 같은!
=맞다, 그런 느낌이다. X세대와 갈등하는 MZ세대를 키워드로 잡았다.
-직급만 생각하면 <미생>의 계약직 인턴이 팀장까지 올라간 거 아닌가.
=직급이 많이 올랐다. 그래서 이제 부릴 사람도 많다. (웃음) 예전엔 늘 무엇을 하라고 지시받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팀원들에게 무언가 하라고 요청하는, 리더가 됐다.
-<오빠생각> 같은 예외적인 필모그래피도 있지만, 아무래도 <미생>에서처럼 선배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미완의 이미지로 임시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을 이끄는 포지션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게 고민한 지점은.
=이른바 ‘쓰레기 하치장’이라 불리는 조세5국 팀원을 연기한 배우들의 체격이 대체로 크다. 문수인이라는 친구는 키가 191cm, 문헌주 선배님은 185cm 정도 되니까. 그래서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 얘기하는 것보다 좀 되바라지게 연기하는 게 오히려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팀원들에게 일을 시킬 때 웬만하면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상대가 서 있으면 그냥 앉아서 할 일 하면서 얘기하고, 전화 받으면서 업무 브리핑하는 식으로 연기했다.
-가치관이 다른 아버지와 갈등을 빚다가 그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변하는 캐릭터다. 회계사를 그만두고 국세청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시청자들이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공백은 어떻게 채워넣었나.
=사실 그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어렵진 않았다. 다만 스타일링을 신경 썼다. 아버지가 죽고 국세청에 들어갔을 때부터는 황동주가 외적으로 멋있어서는 안됐다. 불의를 참지 않는 모습이 무척 통쾌하고 호감을 주는데, 외적으로도 멋있어 보이면 황동주가 너무 완벽하게 다가와 오히려 반감이 생길 수 있다. 혹은 인간미가 떨어져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며칠 동안 세탁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청바지나 패딩, 누렇게 바랜 코트 같은 후줄근한 옷을 입고 머리를 안 감아도 티가 안 날 것 같은 부스스한 파마머리를 제안했다. 이 사람은 전혀 멋있지 않은데 왜 하는 행동을 보면 이상하게 멋있게 느껴지지? 원래 그런 사람이 더 매력 있다.
-조세5국 사람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팀워크를 기대하게 된다.
=촬영하면서 우리끼리 많이 친해져서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자칫 심각해 보일 수 있는 장면도 애드리브로 위트를 넣는다든지 드라마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다. 서로 맞지 않았던 사람들이 상대방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팀워크를 쌓는 모습을 관전하는 묘미가 있다.
-앞으로 <트레이서>에서 어떤 전개를 기대할 수 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집단 속에 들어가면 형식과 절차에 더 얽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규율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 속에 갇히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황동주는 그러지 않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틀 안에서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기상천외한 모습에서 오는 통쾌함이 있다.
-연기의 재미를 알아갈 때 군대에 가서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다고. 그동안 그 갈증은 좀 채워졌나.
=작품 6편을 내리 했으니까 그래도 많이 채워졌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코로나19 때문에 촬영한 작품이 바로바로 나오지 못하니까 호평이든 혹평이든 피드백을 밑거름 삼아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늦어지니까 아쉽다. 기자님들 만날 때 인터뷰를 위해 대본 연구를 다시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웃음)
-예전에는 공부하듯 분석적으로 작품을 힘들게 준비했는데, <원라인>(2016, 감독 양경모) 때부터 즐기면서 연기하는 법을 도전하고 <불한당> 때 그 연기 방식을 확신하게 됐다고 하지 않았나. 군대에서 그 확신이 더 강해졌나.
=굉장히 확고해졌고, 그걸 실천에 옮겼다. <미생>(2014)까지는 나를 갉아먹으면서 연기했다. 데뷔 초기부터 내가 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반응을 받은 건 너무 기뻤지만 이러다가는 내 풀에 내가 꺾여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오랫동안 하기 위해, 과정을 즐기기 위해 연기하는 방법을 바꿨다. <불한당>의 연기에 대해 “너 그렇게 못한 건 아니야”라는 성적표를 주신 것 같아서 확신을 갖게 됐다. 더 도전하고, 더 파보고 싶었다.
-‘이성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아닌가. 계산 없이 동물적으로 뛰어드는 날것의 연기가 좋다고들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임시완은 반대 지점에서 연기에 부딪쳐온 배우다. 머리로 계산했지만 본능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임시완만의 연기 방식은 어떻게 구축됐나. 연기 전공도 아니고 어디서 따로 연기를 배우지도 않은 배우라 이게 늘 궁금했다.
=진짜 같은 가짜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가 맞는 것일까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때로는 진짜 같은 가짜도 답이 될 수 있더라. 결국 두 가지를 잘 접목해서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으면 더 훌륭한 배우로 거듭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평상시에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혼자 시뮬레이션도 많이 한다. 나는 ‘초벌구이’를 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대본을 보며 어느 정도 분석을 하지만 100% 완벽하게 준비하진 않는다. 그건 오히려 굉장히 위험하다. 어느 정도만 채워놓고 현장에서 빈 부분을 채워나간다. 상대방의 대사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고, 그게 상황에 훨씬 잘 맞는다.
-가장 최근에 대중과 만난 작품이 드라마 <런 온>(2020)이다. <보스턴 1947>(감독 강제규, 2022년 개봉 예정)의 마라톤, <런 온>의 육상 단거리는 완전히 다른 운동이다. 그런데 이 호흡은 몇 개월씩 한 캐릭터로 살아가야 하는 배우와 3분 남짓의 무대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아이돌과 닮았다. 둘 모두를 경험해보니 어땠나.
=달리기 자체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다르다. 마라톤은 얼마나 힘을 빼느냐의 싸움이고, 스프린터(육상이나 수영 따위에서 단거리선수를 이르는 말)는 근지를 탄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확실한 건 두 가지를 병행하면 참 좋다. 배우는 평정심과 차분함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이고, 아이돌은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평정심만 유지하고 있으면 사람이 차가워질 수 있는데 중간중간 무대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며 뜨거운 기운을 느끼면 삶이 더 윤택해질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얻은 힌트들이 연기할 때 도움이 된다.
-임시완은 자신의 캐릭터 스펙트럼을 확장해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운 배우라고 생각한다. 누아르 장르와 거리가 멀게 느껴졌던 당신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누아르영화 <불한당>을 찍었던 것처럼. 이런 일이 로맨스 등 다른 장르에서도 지속 가능하지 않겠나. 어떻게 임시완의 저변은 넓어질 수 있을까.
=나도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고, 연기는 사람이 하는 거다. 내가 잘하는 게 뭘까를 고민하고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보일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한다. 소위 로맨스 장르에서 백마 탄 왕자 캐릭터는 내 정서에 있지도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캐릭터로 포장해주는 로맨스 장르의 대본을 받으면, 물론 너무 감사하지만 잘해낼 자신이 없다. 그런데 한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닥쳐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로맨스는 내게 어울린다. 평온하고 여유로운 것보다는 분주하고 치열한 캐릭터가 더 잘 맞는다.
-예를 들면 ‘금수저’ 캐릭터는 안 어울린다거나.
=그렇지, 그런 캐릭터들이 나랑은 거리가 있다. 사람들이 보자마자 “헉!” 하고 감탄하는 완벽한 인간보다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 내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황동주도 그렇게 치열한가.
=너무 바쁘다. 아주 그냥, 너무 바쁜 나머지 <트레이서> 찍는 동안 개인적인 삶이 없었다. 하하하.
-필모그래피에 로맨스 장르가 많지 않아서일까, 임시완만이 할 수 있는 로맨스를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요즘 꽂혀 있는 설정이 하나 있다. 복싱을 배우고 있는데 나랑 너무 잘 맞는다. 드라마 촬영하면서 바쁘니까 얼마 가진 못했는데 시간 날 때마다 가고 싶다. 이런 로맨스물을 하는 거지. 어떠한 계기로 여자주인공에게 꽂혀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복서! 여자를 위해서 결승까지 갔는데 어떠한 배후의 조작 때문에 여자를 위해 결승전을 포기하고 지는 거지. 망신창이가 돼 맞아줄 수 있는 그런 캐릭터는 어떨까? 마지막에 질지, 안 질지는 아직 모른다.
-왜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나. 직접 기획은 다 해뒀으니까 시나리오만 쓰면 될 것 같다. 이미 스토리가 다 나왔네. (웃음)
=약간 로맨틱 코미디 느낌으로!
-어? 처절하고 무거운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너무 처절하면 안타까움이 클 거 같고, 로맨틱 코미디로 적당히 위트를 섞어줘야 보기에 불편하지 않다.
-여기저기서 접한 배우에 관한 일화를 들으며 현실 감각이 굉장히 살아 있는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 대학 생활도 1년 정도 경험하고 데뷔를 늦게 해서 그런가.
=그건 확실히 영향을 줬을 거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다들 바쁘기 때문에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도 다들 핸드폰만 본다. 사람들 시선 때문에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걱정은 전혀 없다.
-그런 면이 인간 임시완에게도 배우 임시완에게도 좋게 작용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을 놓치고 가면 행복도가 떨어질 수 있다. 엄밀하게 인과관계를 따지면 원래 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던 사람이라 그런 거지 행복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다. 성공이라는 키워드가 일적인 것에만 적용되진 않는다. 너무 일쪽에만 에너지가 쏠려 있으면 행복의 밸런스가 깨질 수 있다. 배우 임시완, 연예인 임시완, 직업인 임시완을 떠나서 개인적인 임시완을 잘 가꿔가고 싶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작품을 간단하게 소개해달라.
=<비상선언>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칸국제영화제를 빨리 다시 갈 수 있게 해준 작품이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현실에 맞닿아 있는 공포심을 잘 건드리는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보스턴 1947>에서는 실제 손기정 선수의 제자였던 서윤복 선수를 연기한다. 보면서 같이 숨이 벅찰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