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트레이서' 박용우, 느슨한 유능함
2021-12-29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어느 조직이나 이런 사람은 하나씩 꼭 있다. 박용우가 맡은 오영은 한때 국세청 조세국 에이스였지만 지금은 “일을 안 하는 게 신념”이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새집 지은 헤어스타일, 느슨하게 풀어헤친 넥타이, 며칠 면도하지 않은 콧수염과 턱수염, 낡아빠진 멜빵바지 등 그의 후줄근한 외양은 과거 어떤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중인 영화 <유체이탈자>와 한창 촬영 중인 시리즈 <트레이서> 등 영화와 시리즈를 활발하게 오가고 있는 박용우는 “직장 생활에 많이 치이거나,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끼거나, 뜻대로 일이 안 풀리는 이들이 <트레이서>를 본다면 오영을 통해 위안도 받고, 저런 어른이 되면 참 좋겠다, 라는 마음을 느낄 것”이라고 오영에 대한 단서를 던져주었다.

-정리정돈이 안된 헤어스타일,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콧수염과 턱수염 등 외양이 눈에 띈다.

=대본을 읽고 머릿속에 떠올린 오영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니컬함이고, 또 하나는 그 시니컬함을 숨기기 위한 위트와 코미디 사이의 그 무언가. 오영은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섞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그에 대한 사연이 밝혀졌을 때 공감하면서도 이야기의 메시지를 오영을 통해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다. 어른들의 성장 드라마에 나올 만한 인물이랄까.

-오영이 입고 나오는 멜빵바지를 국세청 직원은 입지 않을 것 같다.

=한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들이 느슨해지게 된 이유를 멜빵바지를 통해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멜빵바지는 가보처럼 무언가를 부여잡고 있는 상황을 드러낼 수 있고, 물론 스타일리시한 면모도 있지만 약간의 위트도 섞였을 것 같은 장치라고 보았다.

-한때는 국세청 조세국의 에이스였지만 지금은 일을 벌이지 않는 걸 신념 삼은 오영이 황동주(임시완)와 부딪치면서 변화하는 서사가, 한때는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가 5년 동안 쉰 뒤 다시 일을 시작하는 당신의 연기 인생 궤적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나만의 해석이지만 오영과 내가 닮았다고 느꼈던 부분은,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성공을 위해 달려왔다는 거다. 과거의 오영도 그랬고 나도 그랬었다. 물론 지금도 일의 성공이 당연히 중요하고 그것을 지향한다. 하지만 나는 그 단계를 벗어났고, 이제는 성공이 1순위가 아니다. 왜 성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목표를 스스로 질문해 찾는 게 지금 내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다. 오영은 그 단계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다.

-촬영 전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에도 그랬을 것 같다.

=만화 캐릭터에서 발췌한 이미지 몇 가지,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넥타이, 낡아빠진 멜빵바지 등 앞에서 언급한 오영의 전체적인 이미지와 연결되는 특징을 감독님에게 말씀드렸다. 어떤 캐릭터를 맡을 때 진지하게 준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나중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끼는 건 캐릭터를 고민하는 방식이 예전과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진짜 치열하게 인물에 대해 고민했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를 막 던진다. 던져서 걸리면 걸리는 거고, 안 걸리면 어쩔 수 없고. 예전에는 내 목소리가 싫어서 변조를 하든 다른 발성을 내든 내 목소리를 안 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목소리로 연기한다. 또 예전에는 모니터를 철저히 했고, 편집실을 찾아가 편집본을 볼 만큼 열의를 보였었는데 지금은 모니터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냥 나를 믿고 한다.

-오영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트레이서>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영화든 시리즈든 대본을 읽을 때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게 제각각이다. 어떤 작품은 서사가 먼저 보이고, 또 어떤 작품은 역할이 먼저 보이는데 <트레이서>는 역할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 작품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대여섯명 등장하고 저마다 성장하는데 그중에서 오영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다. 관객이 <트레이서>를 보고 나중에 오영처럼 나이 들고 싶다, 오영처럼 되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길 바란다.

-<유체이탈자>와 시리즈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데 어떤가.

=지난 20년 동안 연기를 했더라. 이전에는 몰랐던 진리라면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집착하는 건 의미가 없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목표를 찾아서 노력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 같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일의 결과도, 몇년 만에 뭘 했고, 그런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여유가 넘치고 편안해 보인다.

=스스로에게 감사한 건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거다. 삶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는 거고, 지금은 그렇게 가고 있다.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작품을 선택하는 데 반나절도 안 걸리는 거다. <트레이서>처럼 시나리오나 대본을 읽자마자 바로 결정하는 작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차기작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다.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인데.

=자세한 얘기는 아직 꺼낼 수 없다. (웃음) 분명한 건 지금 연기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현장에서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 색다른 역할을 계속 맡고 싶고, 정말 좋은 작품에 많이 출연하고 싶다. 비슷한 역할이라도 레이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지기 때문에 레이어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스스로 빛난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을까. 빛나는 사람을 사람들이 피할까.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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