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간데없지만 온기는 남아 있다. 만원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사직서를 안고 사는 중앙지방국세청 조사관 서혜영(고아성)은 희망보다 유리한 꼼수를 부린다. 명의를 빌려줬다가 피해를 입은 23살 가장이 죽음을 택한 현장에서 그에게 불리한 문자를 지우거나, 의문스런 사고를 당한 내부고발자의 유족에게 남몰래 CCTV 기록을 건네는 식으로. 대기업(<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경찰서(<크라임 퍼즐>)를 지나 국세청에 도착한 배우 고아성은 전작들보다 느슨하고 유연하지만 여전히 쪽팔리게 살 수만은 없는 프로페셔널을 연기한다. 일하는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잇고 넓힐 것인가. 고아성의 화두는 <트레이서>를 만나 더 깊어지고 있다.
-작품에서 착용한 출입증, 사원증을 개인 작업실에 모아둔 것을 봤다. 이번엔 국세청 조사관 신분의 이름표가 생겼다.
=다양한 직장인 캐릭터를 연기해봤지만 국세청 조사관은 한번도 가깝게 느껴본 적 없는 직종이었다. 국세청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가는 게 우선이어서, 제작진이 전달해준 자료를 공부했다. 그런데 국세청만의 특징을 못 찾겠더라. 사무실의 디테일부터 직원들의 옷차림까지 각양각색이었고,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레이서> 속 조세5국 팀의 아웃사이더 느낌에 집중해 내가 본 모습 그대로의 혜영을 만들어갔다.
-그렇다면 혜영은 어떤 스타일의 공무원인가.
=직장인 여성을 연기할 때 그가 치장에 관심이 없고 잘 꾸미지도 않는다는 설정이 이젠 조금 지겹게 느껴진다. 혜영에게도 분명히 자기 취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체크 무늬나 트위드 소재를 더해 그만의 오피스룩을 만들어갔다. 그래도 모토는 약간의 촌스러움이다. (웃음) 힙하지 않음을 제대로 살려보기로 했다. 그게 이 인물과 잘 어울릴 거라고 봤다. 내가 그런 걸 좋아하기도 하고.
-혜영은 후배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뭘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마,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지도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1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가 그거라고 생각했다. 그 한마디에 혜영이 어떻게 살아왔고 일해왔는지가 드러나는 거지. 이후 황동주(임시완)로 인해서 혜영의 태도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에 초점을 두고 연기했다. 진짜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따라하게 되지 않나. 말투를 닮아간다든지. 동주와 혜영은 성별도 성격도 다르지만 그런 식으로 혜영이 동주에게 동화되는 설정을 넣어봤다. 그리고 혜영이 국세청에서 일하게 된 필연적인 이유인 가족사도 조금씩 나올 것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나 <항거: 유관순 이야기>, 드라마 <크라임 퍼즐> <라이프 온 마스> 등에서 보여준 당찬 프로 의식과는 차이가 있는 시작이다. 혜영은 무기력하게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 그러나 선의로 행하는 미약한 실천들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캐릭터들과의 연결고리가 보이기도 한다. 역할이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자기만의 심지를 굳게 세운 인물이랄까. 에너지를 얼마나 발산하느냐의 차이만 있는 것 같다. 계속해서 이런 배역을 맡게 되는 까닭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일단 나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일상을 살면서도 내면이 단단하고 당당한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생기고 존경을 느낀다. 사실 <트레이서> 대본을 봤을 때 혜영에게서 그런 점을 느끼진 못했다. 이타적이기는 하지만 앞선 배역들과의 연결고리는 안 보였다. 그런데 스스로 캐릭터에 무언가를 더하고 설정하면서 어떤 맥락이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하는 여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요즘의 개인적인 화두이기도 하다.
-더 골몰하게 된 계기가 있나.
=최근에 넷플릭스 시리즈 <조용한 희망>을 정말 재밌게 봤다. 가난한 싱글맘이 출장 청소부로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한 고객이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결국 일만이 너를 구원해줄 거라고. 나 또한 연기를 하며 혼자 고군분투하는 중인데, 그 대사에 답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고민을 명징하게 꺼내 보이고 싶진 않다. 대신 삶이 흐르면서 바뀌는 개인적인 화두가 연기에도 조금씩 표현되기를 바란다. 연기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정반대 유형의 인물, 예를 들어 보헤미안이나 사이코패스를 연기해보고 싶은 갈증은 없나.
=몇년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그래서 <트레이서> 바로 다음 작품으로는 아주 새로운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전혀 이타적이지 않고 일도 안 하는 캐릭터. 인물에 대한 책임감과 동경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캐릭터. 그런 게 자연스럽게 끌리더라. 그런데 그 연기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잊고 처음부터 다 다시 쌓아야 할 것 같다.
-공교롭게도 2021년에 공개된 두편의 드라마 <크라임 퍼즐>(시즌), <트레이서>(웨이브) 모두 OTT 플랫폼에서 첫선을 보였다. 배우로서 작업 방식의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고 있나.
=내가 알던 드라마의 규정들을 다 새로 쌓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드라마를 한화씩 공개하면서 시청자와 함께 호흡했다면 이제는 한번에 모든 에피소드를 공개하니까 피드백이 더 기다려진다. 원래는 이 정도 촬영을 했으면 방송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촬영 중후반부터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지. 드라마로 <씨네21> 표지를 찍는 것도 신기하고. (웃음) 이제 시청자들도 이런 형식에 열려 있으니 그걸 믿고 끝까지 만들어보려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