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영화계의 가장 앞자리에 선 감독은 누가 뭐라 해도 하마구치 류스케다. 세계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지각변동을 주목한다. 조짐은 진즉부터 있었다. 대학원 수료 작품인 <열정>이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후 한일 공동 제작의 <심도>, 동일본대지진에 관한 다큐멘터리 <파도의 소리>, 하마구치의 시간을 연 <해피 아워>까지 신작이 나올 때마다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첫 상업영화인 <아사코>가 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각본을 맡은 <스파이의 아내>가 7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2021년은 그야말로 하마구치 류스케의 한해였다. 2021년 3월 <우연과 상상>으로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같은 해 7월 <드라이브 마이 카>로 74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일본영화계의 젊은 거장으로 우뚝 섰다.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중심으로,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세계의 비밀을 전한다. 김혜리 기자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긴 인터뷰에서 정보 이상의 진심, 대화 이상의 교감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뭔가 일어났어.”
필모그래피
2021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
2018 <아사코>
2015 <해피 아워>
2013 <노래하는 사람> <파도의 목소리-신치마치편> <파도의 목소리-게센누마편>
2012 <친밀함>
2011 <파도의 소리> <심도>
2009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
2008 <열정>
2006 <기억의 향기>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내겐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때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수어로 소통하는 이유나(박유림)는 연극이 힘들지 않으냐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녀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새롭게 연출한 가후쿠의 의도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가후쿠는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을 한 무대에 올린다. 언어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들, 언어 이상의 순간들이 피어나길 바라길 가후쿠의 연출을 처음엔 다들 버거워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지루하고 감정을 실을 수 없는 상황은 답답하다. 그러나 익숙한 언어를 사용한 표현이 불가능해진 상황은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이윽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배우들은 다른 방법으로 교감의 통로를 찾기 시작하고, 그때 가후쿠는 말한다. “좋아. 지금 뭔가 일어났어. 아직은 배우들 사이에만 일어난 일이야. 그다음 단계가 있어. 관객에게 그걸 열어가. 하나도 빼먹지 말고 극장에서 다시 재현해.”
말과 침묵 사이에 깃든 영화의 언어
말은 소통의 필요조건이다. 최소한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그걸로 온전히 마음이 전달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은, 차라리 서로의 진심을 감추기 위한 안전지대에 가깝다. 합의된 오해라고 해도 좋겠다. 그곳에서 우리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드러내고, 보고 싶은 대로 상대를 파악하며 머문다. 마치 영원히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착각이 있다. 말은 단지 타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말의 감옥에 갇히면 어느새 그 틀 안에서 사고를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문자와 말 이외 다양한 경로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진심을 대면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상처와 내면을 그린다. 다만 이건 언어의 불완전함, 소통의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리어 언어의 확장에 관한 통찰이다. ‘영화언어’ 역시 그중 하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사별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한 남자의 방황과 정처 없는 내면을 그린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여기에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겹쳐 거대한 은유의 경로를 만들어냈다. 배우이자 연극연출가인 가후쿠는 아내 오토(기리시마 레이카)와 묘한 관계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의 평온은 어딘지 불안하고 불온하다.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모른 체하는 가후쿠의 심경은 아무도 알 길이 없다. 얇은 얼음으로 덮인 평화도 잠시 오토가 가후쿠에게 할 말이 있다던 날, 가후쿠가 일부러 늦게 집에 온 그날, 오토는 지주막하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영원히 아내에게 속내를 밝힐 수도, 외도의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게 된 가후쿠는 그렇게 스스로 세운 마음의 감옥에 갇힌다.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되어 <바냐 아저씨>를 다시 무대에 올린다. 연극제측은 가후쿠에게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도코)를 소개한다. 차 안에서 아내가 녹음해준 대본을 들으며 연출 준비를 하는 가후쿠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미사키의 편안한 운전 솜씨에 연극제 기간 동안 함께 지내기로 한다. 한편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던 배우 다카즈키(오카다 마사키)가 연극 오디션에 참여하고, 가후쿠의 심경은 점점 복잡해져간다. 이야기의 골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 속내를 꾹꾹 눌러담은 남자가 있고, 어두운 과거에 상처를 묻어둔 여자가 있다. 연극제 준비로 오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보내고 어느새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상투적인 전개를 두 가지 방식으로 재탄생시킨다. 하나는 에둘러 도착한 말의 미로, 다른 하나는 침묵과 공백의 가능성이다. 아니 사실 이건 두개가 아닌 하나의 언어다. 말과 글로는 묘사가 불가능한 영역의, 영화언어로 표현된 정교한 마음의 형상.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항상 말이 먼저 도착한다. 다만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른 장소에 당도하여, 일종의 은유로 작동한다.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통째로 복기하는 가후쿠의 붉은 사브 내부는 또 다른 연극 무대다. 어쩌면 가후쿠의 마음속 깊은 장소가 무대화된 곳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토가 죽은 뒤 가후쿠는 더이상 바냐 역을 연기하지 못한다. 바냐의 대사에서 자신이 묻어버린 진심을 발견하고 견디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 2년이 시간이 흘렀지만 가후쿠는 여전히 차 안에서 아내가 녹음해준 대사들을 듣고 있다. “그야 물론이지. 내 생각엔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렇게 두렵지 않아. 가장 두려운 건 그걸 모르고 있는 거야.” 이것은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이자 아내가 전하는 말인 동시에 가후쿠가 듣고 싶었던, 들어야만 했던, 언젠간 들을 수밖에 없는 진실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계승자가 선보이는 ‘쿨 앤드 클래식'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극중극의 형식을 빌려 대사(혹은 말)를 장면 곳곳에 흩뿌려놓고 소박한 은유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은유로 작동하는 이유는 하나다. 말의 발화자와 시제가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먼저 도착한 말의 의미를 장면들이 따라잡을 때까지, (영화라는 이름의) 다른 언어가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리는 영화다. 오프닝 시퀀스의 완료를 알리는 출연 크레딧 자막이 스크린에 불이 켜지고 무려 40분이 지나서야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냐 아저씨>의 연기 연습과정을 다 보여줘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말에 갇힌 언어가 몸에 스며들기까지의 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 내가 너를 이해하는 데, 아니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런 종류의 시간들을 담아내는 방식은 매우 고전적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열정> 이후 이어진 자신의 작업을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라 표현한 바 있다. 다큐멘터리적인 시선과 극영화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카메라는 오직 배우를 향한다. 정확히는 배우를 둘러싼 시간, (가후쿠가 말했던) ‘지금 무언가 일어난’ 시간을 담는다. 의도 없는 우연까지 모조리 담는 게 아니다. 말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면, 정확한 점을 찍을 수 없다면 차라리 말하고자 하는 것 이상의 순간들이 형성되는 시간까지 전부 담아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카메라가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을 포착하는 기술이라 해도 좋겠다.
영화언어의 오리지널리티는 시간을 붙잡는다는 데 있다. 영화는 말과 글에 담긴 정보와 의도에 그치지 않고 그 앞뒤의 공백, 침묵, 분위기와 태도까지 모두 담아낸다. 하마구치의 카메라 역시 말과 글의 갑옷 밑에 갇힌 진심들이 인물은 물론 장면에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동참한다. 우아하고 단정하고 아름답게. 하마구치 류스케가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의 적자로 불리는 건 단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나 무력하고 방황하는 남성에 대한 탐구심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건 태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설득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정, 에토스-태도. 하마구치의 진가는 단순한 기교나 고전적인 연출, 카메라의 문법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태도 그 자체에 있다. 먼저 출발한 말(논리)과 꾹꾹 눌러담았던 진심(감정)의 벌어진 거리는 마침내 새하얀 눈과 함께 내린 정적과 침묵(태도)을 거쳐 당신 앞에 하나의 의미로 거듭난다. 우리는 그걸 ‘영화(언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