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천 개의 파랑' '어떤 물질의 사랑' 소설가 천선란 "글을 고치면 반드시 좋아진다는 믿음"
2022-04-07
글 : 이다혜
사진 : 오계옥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천선란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 중에서)

"소설집 교정을 보고 있어요. 경장편 마감도 조금씩 하는데, 드라마 스토리 만드는 것도 하고 있어요. 저는 잘 때랑 밥 먹을 때 빼고는 읽거나 쓰는 작업을 계속하는 편이에요.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고 난 뒤 가장 큰 변화는, 소설을 쓸 때 겁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전에는 공모전에 소설을 내면서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천 개의 파랑> 때부터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자는 마음으로, 거의 질주하듯이 썼어요. 저 자신이 읽기에는 더 즐겁게 쓰고 있구나 싶죠. (<천 개의 파랑>은 3주 만에 쓰셨다면서요?) 하루에 3~4시간 자고 계속 썼어요. 퇴고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때는 기억도 잘 안 나요. 나중에 책 나오고 나서 읽어보니 새로운 느낌인 대목들도 있더라고요. (웃음)

장편이 쓰기에는 단편보다 훨씬 재밌어요. 제게는 그래요. 인물들 위주로 먼저 생각하고 플롯도…. 트리트먼트를 짜놓아도 인물들 때문에 다 바뀌거든요. 그런 경험과 기분을 즐거워해요. 거의 다 쓴 이야기를 포기하고 새로 쓰는 때는, 울면서 그래도 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단 다시 써요. 그 과정이 체력적으로 힘들다기보다는, 인물이 선택한 이야기, 아니면 다시 쓴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고 느껴질 때 뿌듯함이 크죠. 고쳤을 때 반드시 좋아진다는 믿음이 있어서 힘들더라도 울면서 바꿔요.

고치는 기준이요? 소설에 제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한번 바꾸는 것 같아요. 인물이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가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장면이나 문단을 억지로 넣은 느낌이 나면 저를 뺀다는 느낌으로 고쳐 써요. 제가 하고자 했던 얘기를 하지 못하더라도 인물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아니면 거르는 연습을 계속 해요. (단편집 <어떤 물질의 사랑>의 <사막으로>나 장편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는 부모님과 관련한 경험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데요. 그런 이야기일 때도 픽션으로서의 이야기가 단독으로 존재하게 만든다는 뜻일까요?) 이야기를 만들 때 스토리보다 인물 세팅에 공을 들이거든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해요. 이 인물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저와 철저하게 하나하나 다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죠. 그 작업이 진척되면 그 인물에 빙의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글을 쓰죠. 그러면 제가 느끼는 감정 하나만 남은 채로 아예 다른 인물이 소설에 남아요.

저는 초고는 일단 3개월 안에 끝내는데, 퇴고를 기약 없이 하는 편이에요. 퇴고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쓸 때도 있고요. 그렇게 해도 쓰는 속도 자체가 빠르다 보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편집자님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고까지 길어도 한 6~7개월 안에는 끝내는데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아직까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자는 생각으로 질주하듯이 쓰는데 반복하는 느낌을 주게 될까봐 고민하고 있죠. 언젠가는 <메이즈 러너>처럼 거대하면서도 촘촘하게 구성된 세계를 만들고 싶어요. 최종적으로는 <반지의 제왕>처럼 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고요.

(<천 개의 파랑>이나 <나인>의 중심인물이 10대인데,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더라고요.) 요즘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청소년의 모습이 너무 암울할 때가 많잖아요. 제가 청소년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실 20대와 10대 후반은 특별히 다를 게 없거든요. 자기 생각도 뚜렷하고 행동할 수도 있는데, 어른들은 안된다고 하죠. 제가 고등학생 때는 수입 쇠고기 파동 때문에 시위가 한창이었어요. 어른들이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마, 가만히 있어’라고 했는데, 우리는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의 세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현실에서는 어른들 때문에 눌려 있죠. 저는 예고를 나왔는데요. 예고를 나와서 제일 좋았던 건 소설을 일찍 배운 게 아니라 다들 반쯤 미쳐 있었다는 거예요. 복도에서 연극영화과 애들은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고 다녔고…. 전공마다 다 특색이 있었거든요. 저는 문예창작과였는데, 선배들은 글을 잘 썼고 후배들은 공부를 잘했는데, 저희는 다 어중간해서 구박을 받았어요. 근데 아무도 기죽지 않는 거예요. 선생님이랑 싸울 때는 싸우고. “공부 못해도 괜찮아. 우린 건강하잖아.” 그랬던 기억이 나요.

(<천 개의 파랑>을 읽을 때 초반 30여 페이지에서 이미 울어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있어요. 작가님도 쓰면서 울 때가 있나요? 아니면 차가운 마감의 승부사처럼….) 저도 쓰면서 감정적 고통을 많이 겪어요. 울었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좋은 이유는 캐릭터에 이입을 했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저는 캐릭터를 분신처럼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만든 세계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사건이 해결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완고를 하고 나면 헛헛함이 오래가요. 장편소설은 책이 나올 때까지 우울감이 지속되죠. 인물들과 헤어졌다는 느낌도 나고. <나인>을 쓸 때는 마지막에 권도현이라는 캐릭터가 사과를 할 때 처음으로 눈물이 살짝 났거든요. 이 장면을 위해 달려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왜 이런 장면을 현실로는 볼 수 없을까 싶었고.

(몇 작품에서는 외계인이 중심인물인데 동물이나 식물을 그릴 때와는 다르게 외계인에 친밀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천선란 작가에게 외계인이란?) 제발 있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직 여기에 없다는 가정하에, 언젠가 인류가 외계인과 조우한다면… 우리가 이 행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하는 인간의 유일한 타자가 외계인이라는 생각을 해요. 비유나 은유로서의 외계인이 아니라, 제게는 외계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에요."

천선란 작가의 최근 SF픽 3

김보영 소설집 <다섯 번째 감각>, 연극 <일분위 고독인>, 연산호 웹소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천선란 작가의 루틴

첫 번째, 절대로 잠을 줄이지 않는다. 두 번째, 끼니를 거르지 말자. 아침 10시에는 일을 시작해서 11시간 정도는 글을 쓴다. 글만 쓰는 건 아니고 여러 일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