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육아휴직 중이라 아이를 돌보며 글을 쓰고 있어요. 그전에는 겸업으로 작가 생활을 했고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는 루틴이라는 게 없어요. 10년 정도 직장을 다니며 아마추어로 소설을 쓰던 시기에는 틈이 나면 글을 썼어요. 시간 있을 때 빨리빨리. 시간이 너무 안 나니까 한 시간이라도 생기면 글쓰기가 간절했어요.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쪽은 아닌 것 같고요. 헤매는 시간도 길었죠. 처음 데뷔를 준비하던 때는 단편 응모를 받는 곳에 맞춰 단편을 썼는데, <테세우스의 배>를 쓰면서 제가 장편에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2년 정도 노력해봤는데 그림이 정말 안 늘었어요. 이후에 게임 개발 같은 것도 해보다가, 제가 결국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건 스토리를 짜는 일이구나 깨닫게 됐어요. 그러면 소설이 가장 효율적이었고요. SF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김보영, 배명훈 작가님을 따라 해보기도 하면서 제 스타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아이디어가 겹치지 않게 하려고 다른 작품을 안 본다는 영화감독 인터뷰를 읽었어요. 그런 글을 읽으면서 제가 착각을 했구나 싶어요. 선배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아무것도 빚지지 않고, 내가 작품을 한다고 말하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면 가능한 한 인공지능 이야기를 전부 읽어봐야 오히려 참신한 소설을 쓸 수 있어요. 여러 작품을 읽고 나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보여요. 그걸 분석해내는 눈이 생기면 내 작품이 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20년 SF어워드 대상을 수상한) <테세우스의 배>를 쓸 때 제가 그런 실수를 좀 했어요. 영화 <미션 임파서블3>를 좋아하는데,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영화거든요. 그런데 소설을 그렇게 쓰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죠.
(소설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영감은 어떤 형태로 찾아오나요.) 장면을 떠올려요. 내가 쓰고 싶은 장면, 꼭 넣고 싶은 대사. 그런 것들을 엮을 수 있겠다 싶으면 배치를 해보죠. 여러 사건에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주인공이 되고요.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나머지 부분을 채웁니다. 핵심 장면들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나머지는 그 장면들이 돋보이거나 논리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채우는 장면들인 셈이죠. 액션 신을 쓸 때가 가장 재미있어요.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글을 써왔는데, 단편집을 묶으면서 보니 스타일이 고정되는 경향도 제 눈에는 보이더라고요. 작가로서 그 문제를 극복할 시점이 되었다고 느꼈죠. (<씨네21>에 ‘이경희의 SF를 좋아해’라는 칼럼을 연재 중인데요. 다른 작가들의 글은 추천하면서도 본인 작품에 대해서는 쓸 수 없잖아요? 작가님 작품을 그 코너에 소개한다면.) 제가 대단한 식견이 있거나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저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간결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스타일의 소설가거든요. 창작자 이전에 열렬한 소비자였는데, 그렇게 20여년을 보내고 나니 보고 싶은 것을 쓰고 싶어진 거죠.
(SF에서는 미래를 상정하고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SF소설을 쓴다는 것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이 있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저를 보게 된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말을 하고 걷기까지 정말 많은 단계를 극복해야 하거든요.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를 느끼게 되죠. 모든 걸 처음 겪는 아이들의 불안도 보게 되고. 인간은 왜 태어나 살아가는 걸까, 왜 죽음이라는 간단한 해법 대신 삶이라는 복잡한 길을 택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그때, 그곳에서>는 그런 고민 속에서 내용이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체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린북 에이전시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SFWUK에 소속되어 활동하는데, 작품 활동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궁금한데요.) 둘은 성격이 많이 다른데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SFWUK는 작가들의 노조라는 생각으로 가입했어요. 물론 노조처럼 활동하는 건 아니지만요.
프리랜서인 작가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작가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면에서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더라고요. 에이전시와 일을 하게 된 것은, 제가 겸업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100% 일에 몰입하기가 어렵잖아요. 계약이나 일정을 관리해주는 파트너가 있으니 도움이 되더라고요.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에이전시가 책의 단위가 아니라 작가가 가진 이야기의 단위로 작품의 여러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생각해요.
이제 출간 예정인 작품들을 말하면, <테세우스의 배>의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확장하는 첫 작업인 연작 단편집이 나올 예정이에요. 한국에서 SF가 3부작이라든지 예전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10권 이상 끌고 가는 시리즈가 많이 없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서 최소 5권을 목표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다른 작품은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에 수록된 단편인 <우리가 멈추면>의 또 다른 버전인 작품인데요. 이번에 단편집을 묶으면서 보니 작품의 결함이 계속 보이더라고요. 파업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보여준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있죠. 그래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초능력자 이야기를 장편으로 썼어요. 다만 이번엔 파업 이야기가 아니라 혁명 이야기예요. 많은 소설들은 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에서 끝나거든요. <우리가 멈추면>에서 저 역시 그랬고요. 그다음에는 모두가 불편해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피하게 되죠. 그래서 꼭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독자님들이 어떻게 읽어주실지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경희 작가의 최근 SF픽 3
영화 <매트릭스: 리저렉션>, 김보영 소설 <진화 신화>, 황모과 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이경희 작가의 루틴
지금 내 글 쓰는 시간은 아이한테 달려 있다. 그래서 작업 루틴은 따로 없는데, 작품을 쓰는 내내 노래 한곡을 무한 반복으로 듣는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리스트가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이라고 생각한 곡을 반복해 들으며 글을 쓴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느낄 감정을 담은 곡을. <그날, 그곳에서>를 쓰던 때는 아이유의 <에잇>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