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21세기 한국의 시네필과 영화관의 (비)장소성
2022-04-24
글 : 씨네21 취재팀
글 : 이선주 (한양대 현대영화연구소 연구교수)
누구의 영화인가 그리고 어디에 있는가

극장영화란 무엇인가. 극장영화는 어디로 가는가. 혹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지난주(<씨네21> 1351호) 김호영 교수가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역사를, 정찬철 교수가 뉴미디어의 등장에 따라 극장이 어떻게 자기 변신을 해왔는지를 탐색하는 글을 실었다. 이어서 이번에는 이선주 교수가 ‘21세기 한국의 시네필과 영화관의 (비)장소성’에 대한 심도 깊은 사유의 글을 보내왔다. 대중잡지 독자들에게 쉽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꾸준히 이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영화 주간지로서 <씨네21>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다. 답이 아닌 가능성으로, 우리의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프롤로그: 영화관에 들어가며

최근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하며 재개관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매혹적인 트레일러 영상을 상영하는 영화관이다. 영상은 <러시아 방주>로 시작하여 <연연풍진>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현기증> <벌집의 정령> <스트롬볼리> 등 각기 다른 세계를 향한 창과 문, 외화면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모호한 시선을 몽타주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곧 어떤 낯선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을 갖게 된다. 극장의 불이 꺼지고 영화의 세계로 이끄는 영상과 음악(사일런트 파트너의 'Big Screen'이라는 최면적인 선율)의 안내를 통해 관객은 곧 상영될 본 영화의 충만한 관람을 위한 지각의 준비운동을 마친다.

“ 실물보다 큰”(Bigger than Life): 시네마테크의 시네필

“메신느 거리의 상영실에서 이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영화들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독일 표현주의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실험영화 등등. … 여기에서 그들은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 같은 감독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시네마테크는 그들로 하여금 장르를 인식하도록 했고 그것을 사랑하도록 했다. … 랑글루아의 프로그램에 꾸준히 오는 관객은 마이어브리지와 마레의 시대 이후의 이미지의 역사에 깊이 침잠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리처드 라우드, <영화 열정> 중)

영화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시네필리아’(cinephilia)는 제의적 행위로서의 영화 관람이나 실물보다 큰 스크린과 이미지, 극장의 어둠, 빛의 프로젝션에 대한 매혹, 즉 필름 자체와 일회적 상영의 경험을 중요한 구성요소로 강조한다. 20세기의 영화를 사랑했던 철학자 및 비평가들은 영화의 존재론과 관객의 매혹을 다루면서 영화(film) 미학 ‘너머’의 시네마(cinema)라는 장치와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의 물리적 경험이 낳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롤랑 바르트는 에세이 <영화관을 나오면서>에서 도시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자유로움의 장소로서 영화관이 갖는 장소성에 주목했다. 그는 영화관의 어둠이 주는 낯섦과 은밀함을 현대적인 ‘장소의 에로티시즘’으로 비유하면서 친숙한 공간(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조건과 영화관의 매혹을 비교한다. 바르트는 영화 자체보다도 상영장소(salle)에 더 집중하면서 영화관의 매혹을 설명하지만, 글의 서두나 마지막 부분에서도 밝히듯 그는 또한 영화관을 ‘나오는’ 정황과 영화 속 상상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거리두기’의 사유를 드러낸다. 이 글에서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바르트가 이 글을 쓴 1975년 무렵은 68혁명 이후 서구 시네필리아의 역사에서 영화에 대한 매혹(enchantment)보다는 거리두기에 의한 ‘생산적 각성’(productive disenchantment)의 중요성이 제기되며 영화연구와 이론의 제도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즉 이전까지 시네필리아를 지탱했던 영화의 매혹에서 벗어나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등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작용과 문화적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욕망이 현대 영화이론과 영화학을 정립했던 것이다.<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로 말하자면 급진적인 ‘적색 시대’, 거대 이론의 시기인 1970년대를 지나 프랑스 시네필들에게 시네필의 경험과 관객의 존재론이 다시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한 책은 바로 1980년에 출간된 장 루이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다.

셰페르는 특정 이론이나 비평적 시각으로 감독이나 작품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영화 이미지의 경험과 정동에 주목하면서, 영화적 어둠을 선사하는 영화관이라는 공간과 밤의 경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의 존재조건과 시각의 원초적 경험들을 내밀하게 고찰한다. 셰페르는 자신을 영화관에 자주 다니는, 별다른 ‘특성이 없는’ 평범한 남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의 사유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영화 관객 모델을 넘어 영화적 경험을 통해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이차적 몽타주’를 수행한다. 따라서 그의 시네필 여정에는 정전화나 영화적 지식에 대한 욕망 대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들이 수반된다. 그것은 영화관의 어둠과 빛의 먼지, 안개처럼 물리적 장소에 실재하며 우리의 지각과 기억에 관여하지만 주변적이거나 알 수 없는 대상으로 남게 되는 경험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즉 언어로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영화를 본다’는 체험의 의미, “세계와 빛, 경험과 이미지와 기억, 시간과 신체를 둘러싸고 영화적 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남긴 혼신의 기록”인 셈이다. 이러한 시네필적 실천들은 모두 영화 보기를 콘텐츠로서의 영화 보기(watch a film)만이 아닌 물리적 장소로서 ‘영화관에 가는’(go to the cinema) 행위, 말하자면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영화 관람 전후 상황의 맥락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영화 관람 실천을 포괄한다. 그런데 1960~70년대 이들이 상정한 영화 관람성은 모두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조건이 전제된 상황에서의 영화 경험들이다. 이렇듯 20세기에 만들어진 거의 모든 영화들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을 행위자로 하는 시네필의 역사는 프랑스나 서구의 영화 문화 안에서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1960~70년대 파리-뉴욕-런던 등을 횡단하며 비판적 실천력을 갖춘 이상적인 주체적 관객으로서 상정된 서구 시네필리아 현상과 비교해볼 때, 한국영화에서 ‘대안적 영화 문화’를 논할 수 있는 시네필의 물리적 조건(영화의 집으로서의 ‘극장’과 셀룰로이드 ‘필름’)이 갖춰진 것은 언제쯤일까?

Back to 1995~2005: 한국 시네필의 압축적 형성과 영화의 집으로서의 ‘극장’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

“1964년부터 한양대에서, 1967년부터 동국대에서 연극영화과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무려 5년간 보지 못했다가, 지난해 KBS TV를 통하여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나 <인톨러런스>를 보지 않았으면서도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유럽의 영화는 주목할 만한 문제성을 제시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영화작가가 베르이망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산딸기> <제7의 봉인> <침묵> <처녀의 샘> 등 화제작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그러한 기회를 늘 잃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신봉승, <영상적 사고>(1972) 중)

1950~60년대 프랑스에서 영화가 대안적 문화 실천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은 비평 노선으로서의 작가 정책 외에도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영화 저널리즘, 영화의 집인 시네마테크, 그리고 영화 사랑을 실천한 시네필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영화 잡지 <영화예술>이 ‘좋은 영화 보기’ 관객 운동을 모토로 대학이나 대도시 영화 팬을 중심으로 ‘시네클럽’ 운동을 펼치며 상영회와 심포지엄을 주도했고, 1970~80년대 문화원 세대와 서울영화집단의 이론과 실천, 1980년대 시네마테크를 표방한 비디오테크 활동 등 소비 위주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항하는 다양한 시네필리아적 현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인용한 글에서도 볼 수 있듯, 한국에서는 시네필리아의 중요한 물리적 조건인 ‘대안적인 프로그램을 상영하는’ 극장이 1990년대까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시네필 문화의 진지로 알려졌던 <키노>(1995~2003)도 시네필을 위한 정전(canon)을 제시하긴 했지만 극장이라는 판테온을 절대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비극장의 대안적 영화 관람을 소개했다. 1990년대까지 한국 시네필 문화의 중요한 기반은 엄밀히 말하면 ‘비디오테크’ 상영 문화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활동했던 비디오 상영 기반의 영화 단체들은 서울의 ‘영화공간 1895’, ‘OFIA’, ‘문화학교 서울’, ‘시네포럼’ 등과 부산의 ‘1/24’, 광주의 ‘좋은 친구들’, 대구의 ‘영화언덕’ 등 다양했다. 창간호부터 <키노>의 지면 중에는 ‘시네마테크’ 코너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문화학교 서울’을 포함한 전국 비디오테크들의 프로그램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문화원 상영 소식, 독립영화협의회의 월간 프로그램 등이 기자들의 추천사와 함께 실리곤 했다. ‘영화공간 1895’를 주도한 이광모가 이끈 고전예술영화를 수입해 상영하는 동숭시네마텍 같은 예술영화전용관이 1995년에 출범했고, <천국보다 낯선>을 시작으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을 소개하며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나 고전 예술영화를 매달 1편씩 개봉했다. 한국의 시네필들이 글로만 접하거나 상상 속의 시네마테크에서만 볼 수 있던 장 뤽 고다르와 잉마르 베리만, 알랭 레네의 필름영화를 극장에서 만나게 된 시기는 영화 탄생 100주년 즈음인 1990년대 중반이었다. 동숭시네마텍은 이름이 표방하는 바처럼 새로운 영상 문화 운동의 주체를 추구하면서 그때까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공공성을 띤 시네마테크를 지향하며 탄생했지만, 다양한 대안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시네마테크가 아니라 예술영화전용관이었다. 따라서 미개봉된 영화나 수입 금지작, 정전들에 대한 갈증은 이러한 전용관과 여전히 공존했던 비디오테크에서 상영되는 열화된 영상으로 대리 충족되곤 했다.

(독립영화의 역사를 포함한) 한국 시네필 문화에서 이러한 비디오필리아의 활동들이 의미 있었던 것은 단지 셀룰로이드와 극장이 결핍된 물적 조건 속에서도 시네마테크의 정신을 실현하고 이상화된 관객으로서의 시네필리아를 체현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작가주의 모델을 넘어 영화의 매혹과 각성 사이의 생산적 긴장을 통해 ‘비판적 시네필리아’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비디오테크는 제도와 자본, 물적 토대의 부재로 인해 현대적 시네필리아의 중요한 요건인 ‘진정성’의 존재론적 구성요소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2000년대 초반 극장을 기반으로 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전국적으로 출범하고, 서울을 기준으로 한다면 서울아트시네마와 서울시네마테크가 비로소 극장에서 ‘필름 시네마테크’ 프로그램을 선보였던 시절이 한국에서는 대안적인 극장(시네마테크)의 시네필 영화 문화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일 것이다. 문화학교 서울의 루이스 부뉴엘, 에릭 로메르,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성공적으로 개최됐고, 서울시네마테크는 개관 프로그램으로 오슨 웰스 회고전을 열었으니,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1)에서 책으로 배운 오슨 웰스의 정전들을 필름 시네마테크에 ‘확인’하러 온 시네필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 시기 서울시네마테크에서 발행한 <필름컬처>는 <키노>와는 차별화된 노선으로 미국영화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며 세르주 다네나 조너선 로젠봄, 태그 갤러거 등의 비평을 소개함으로써 시네필 문화를 다채롭게 했다. 주간지 <씨네21>과 월간지 <키노>, 계간지 <필름컬처>가 각기 다른 노선으로 시네필 문화를 선도하며 영화가 비평을, 비평이 다시 영화를 이끌었다(이후 영화 잡지들의 춘추전국시대는 2003년 <키노> 폐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고 <씨네21>만 생존한다).

그런데 2000년대 초 비디오테크에서 시네마테크(극장)로의 전환은 한국에서 현대적 시네필이 제도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서구의 시네필과는 다른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록 유럽 예술영화, 할리우드 고전영화와 같은 정전화 및 이 과정에서 다른 영화들(다큐멘터리,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필름 앤드 비디오 등)의 배제라는 현실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매체와 장소의 전환은 한국에서의 시네필의 의미가 정전화된 감독들의 목록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화’ 및 ‘영화 보기’에 대한 자기반영적 고민을 수반했음을 시사한다. 더구나 이러한 이동이 서구에서는 ‘영화의 죽음’이 논의되던 시기, VHS에서 DVD로의 이행기, 아날로그 시대와는 다른 시각적, 매체적 쾌락을 전달하는 디지털 시대로의 이행과 맞물려 압축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 시네필의 형성 과정과 극장이라는 장소의 문제는 더욱 세심한 맥락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진정성의 조건을 갖춘 시네마테크의 필름 매체로의 전환과 극장으로의 장소의 전환이 반드시 관객의 역량을 이끌거나 더 생산적인 시네필 활동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필름 시네마테크로 전환된 이후 영화 관람 환경은 향상되었으나, 1990년대 비디오테크에서 수행했던 영화 교육 프로그램이나 문화활동들(토론, 출판 및 강연 등)의 열기는 오히려 줄어들면서 시네필들의 활동은 감소했다. 대안적 영화 문화란 극장의 하드웨어적 퀄리티나 서비스라는 말과 결코 등치될 수 없는 복잡한 국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벌집의 정령>(1973)

극장 노스탤지어가 없는 ‘새로운 시네필리아’

2015년 서울아트시네마 이전을 계기로 열린 김홍준, 정성일, 허문영의 좌담회(‘1995~2015 변모하는 영화의 풍경’)에서 정성일은 동시대 시네필의 지도를 “시네마테크 시네필, 시네큐브(아트하우스) 시네필, 영화제 시네필, 아이맥스 시네필”로 잠정 분류한다. 이는 모두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기반에 둘 때 성립하는 시네필의 개념이다. 그런데 <씨네21>이 ‘밀레니얼 세대 시네필’(1252호)로 명명한 젊은 세대의 시네필 가운데는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없거나 자유로운 경우가 많다. 21세기 서두에 급변하는 영화 환경과 뉴미디어 시대의 시네필리아에 대한 두개의 영향력 있는 앤솔러지인 <영화의 변이: 세계 시네필리아의 변모하는 얼굴>(Movie Mutations: The Changing Face of World Cinephlia, 2003)과 <시네필리아: 영화, 사랑, 기억>(Cinephilia: Movies, Love and Memory, 2005)이 출간된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영화학 분야의 중요 학술저널인 <시네마 저널> 및 <프레임워크>가 시네필리아의 역사 및 디지털 시대의 시네필 문화를 질문하는 특집호 또는 특별 도시에를 간행했고, 2015년 <디지털 시대의 영화비평>(Film Criticism in the Digital Age), 2020년 <근심하는 시네필리아>(Anxious Cinephilia)가 출간되는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영화 환경에 따른 21세기 시네필리아의 정체성과 영화와 비평의 플랫폼 변화를 고찰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는 신성화된 공간의 단일성, 그리고 그 순간의 유일성과 함께 공간 속에서 대상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동일시되어 있었던 전통적인 시네필을 시네필리아 1세대로 규정한다. 반면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을 수용하고, 팬-컬트 커뮤니티를 찾아내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비전통적인 형식으로 실천하는 2세대 시네필리아를 명명하고 그들의 비아카데믹한 활동을 주목한다. 엘새서는 시네필리아 2세대에게는 찰나의 영화적 경험이 아닌, 찰나의 자기 경험에 대한 ‘수집가’와 ‘아키비스트’로서의 역할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지위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시네필리아의 영화 소비 실천을 세개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마지막 3단계에 해당하는 1980년에서 2010년대를 ‘경험의 재지역화’라고 명명하며 ‘아마추어 문화의 신성화’ 현상을 주목한 로렌 줄리에와 장 마크 레베라토의 연구로도 계승된다. <영화의 변이>의 공동 편집자인 비평가 조너선 로젠봄과 에이드리언 마틴이 지적하듯, 현대 시네필의 상황은 시네필리아에 대한 기존 논의들에서 주요 논점이 되어온 ‘극장 가기’ VS ‘집에서 보기’간의 대립을 부적절하게 만들어왔다.

기리시 샴부는 2019년 <필름 쿼터리>에 올드 시네필리아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네필리아의 매니페스토(“For a New Cinephilia”)를 발표했다. 전통적인 영화관과 표준적인 극영화를 넘어선 여러 형태의 무빙 이미지 체험, 영화 관람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 정체성의 정치학에 기반한 액티비즘적 활동과 비아카데미적 실천들, 정전화된 미학과 위계적 리스트를 벗어난 즐거움과 가치평가의 개방성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선언은 시네필리아의 사랑과 즐거움의 담론을 소수의 특권에서 다수로 확장시키면서 오늘날 영화 문화의 포괄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이는 <기생충>의 글로벌한 파라(para) 텍스트 비평과 밈의 사례처럼 아마추어 문화나 팬 문화의 역량을 강조하며 과거의 영화 사랑뿐 아니라 오디오비주얼 비평 등 새로운 세대의 영화적 모험까지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오늘날의 시네필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영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유희의 실천으로부터 기인하는 이슈들을 탐구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새로운 세대의 시네필리아를 출현시키고 (‘비디오필리아’, ‘텔레필리아’, ‘모바일 시네필리아’ 등) 시네필리아 개념의 새로운 층들을 덧붙여나간다. 엘새서가 진단하듯, 뉴미디어 시대의 시네필리아는 우리의 미디어 기억의 무한정한 아카이브를 잠재적으로 욕망할 만하고 가치 있는 클립들, 엑스트라와 보너스들로 리마스터링, 재구성, 재설정(re-mastering, re-framing, re-purposing)하면서 기억의 위기에 맞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포스트모던 영화 문화의 최전선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포스트-시네마 시대 시네필의 분화와 재배치: 스크린을 접으며

한국 시네필의 역사에서 관객이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를 필름으로 관람하기 시작하고, N차 관람을 포함한 극장 경험이 시네필의 미덕으로 여겨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전 시대의 비디오테크 문화나 문화원 상영, 대학 공동체 상영을 통한 관람 방식은 시네필의 실천이 아닌 것이 되는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경험은 가장 이상적인 영화적 경험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유일한 영화가 아닌 복수의 플랫폼의 영화들, 다양한 무빙 이미지, 다른 스크린과 생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장소일 때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극장 중심의 영화산업의 위기는 그러한 다양성의 영화 역사 속의 한 국면일 수 있고, 영화라는 매체나 관객의 영화적 경험의 위기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의 지속과 변화를 탐구한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관객의 지각뿐 아니라 성찰성과 사회적 실천까지 포함하는 영화적 ‘경험’에 주목하며 ‘재배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시네마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것은 ‘필름-영사기-극장’ 복합체로 된 물리적 측면의 영속성이 아니라, 보고 듣고 감각하는 경험 형식의 생존 여부라고 말한다. 재배치는 영화의 구성요소가 극장을 벗어나 다른 장소 또는 이질적인 인터페이스에 자리 잡을 때 영화적 경험이 부분적으로 보존되는 동시에, 고유한 새로운 경험과 행위들이 부가되는 이중적 작용이다. 따라서 영화적인 것의 재배치는 과거의 기억이나 습관보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네마가 다른 디스포지티프와 환경으로 지속적으로 재배치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분위기를 띠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완전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의 운명인 것이다. 카세티의 말처럼 “시네마는 여전히 발견되어야 할 대상”이고, 오늘날의 시네필은 로젠봄이 이야기하듯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누구의 영화인가’, 그리고 ‘영화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