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원래 속도에는 ‘물체의 빠르기’라는 의미만 있지 그 자체가 빠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느린 것 역시 속도인데 지금 세상에서 속도란 그저 빠른 것만을 표현하는 것 같다. 효율, 유용성과 경제성만이 바람직함의 척도와 같은 세상에서 윤성희의 소설을 읽는 일은 일상의 체감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영상을 꾸욱 누르면 2배속으로 빨라지는 기능이 있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축약해놓은 영상조차 2배속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빠름의 경쟁 속에서 <느리게 가는 마음>의 인물들은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고, 동네를 쏘다니며 금속탐지기로 땅 밑에 누군가 묻어두었을 타임캡슐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싶은 무용한 인물들의 여행에 동행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원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 느리디느린 세계에 함께 머물고 싶어진다.
<타임캡슐>의 진형의 유튜브 채널명은 ‘어설픈 코난’이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별 쓸데없는 사건을 파헤치는 이 귀여운 코난의 첫 영상 조회수는 13건이다. 겨우 13명이 본 이 영상은 동네에서 불거진 원조 쫄면집 논란에 어느 쫄면집이 진짜 원조집인지를 파헤치는 영상이다. 친구의 집 마당에서 아기 인형이 담긴 작은 관이 발굴되자 진형은 ‘상자가 묻혔던 구멍을 찍고 싶다’며 찾아온다. 이처럼 동네 곳곳에 묻혀 있을 상자를 찾아, 아이들은 땅을 파헤치고 다니는데 거기서는 주로 레모나 깡통(타임캡슐)이 출토된다. 어떤 소원을 적었는지 흔적도 남지 않은 축축한 종이들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20년이 지나 발견된 타임캡슐은 느리게 도착한 바람들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우리 좋은 어른이 되자, 서로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을 빛나는 낙관. 8편의 단편에는 여러 차례 생일이 등장한다. 거짓말로 생일을 맞이한 아이도 있고, 부모가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 화가 나 가출을 감행하는 아이, 생일에는 절대 혼내지 않겠다는 가족의 약속을 받아내는 아이도 있다. 1년에 단 하루, 그날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행복하길 다짐하는 날.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소설 속 인물들은 가짜 생일에조차 소소한 행운을 서로에게 선물한다. 누군가의 생일에 느리게 가는 소설을 선물하자.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생일에 읽어야겠다. 그게 이 세상을 똑똑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지라도.
“나중에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게. 그러면 엄마는 또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되어줘.” 그렇게 속삭였더니 할머니는 사라지고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자장가>,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