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 2부에 등장하는 해영(이설)이 가진 밝음은 100%를 넘는다. 민(권유리)이 일하는 특수 청소 업체에 합류한 첫날부터 낯가림 없이 한팀이 되고 한집 생활을 하게 됐을 땐 애교 많은 막내딸처럼 군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해영이 내뿜는 에너지는 주변을 따뜻이 데우기보다는 서늘하게 만드는 쪽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해영은 민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순수하고 다정한 사람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 착한 척 위장하고 있는 걸까? 앞선 1부의 기이한 소녀 소현(기소유)이 자라서 누가 됐는지를 찾는 2부에서 이설은 인물의 텐션을 능란하게 조절해가며 관객을 혼란시킨다. 데뷔 이래 보통 사람과 극단적 캐릭터를 고루 맡으며 양쪽의 능력을 동시에 길러온 그의 저력이 <침범>에 이르러 빛을 발한다.
- 문학잡지 <릿터>에 책을 좋아하는 배우로 소개된 바 있다. 그만큼 <침범> 시나리오에 대한 감상이 궁금하다.
한장 한장 넘기면서 누구 하나 안쓰럽지 않은 인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해영이가 그랬다. 미치도록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활자를 뚫고 나오는 듯했다. 그 강렬함이 잊히질 않았다. 그래서 감독님들을 만났을 때 솔직담백하게 말씀드렸다. “저 해영이가 하고 싶어요. 제발 하게 해주세요”라고.
- 해영에 앞서 소현에 대한 탐구가 이뤄져야만 했다. 소현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나는 소현이가 선천적으로 다른 기질을 타고났다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일전에 내가 연기한 <나쁜형사>의 후천적 사이코패스 은선재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소현의 엄마를 맡은 (곽)선영 언니는 나와 다르게 후천적인 걸로 생각해 신기하기도 했다. 소현이뿐만 아니라 해영이까지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혼자로는 부족하니 김여정, 이정찬 감독님에게 매달렸다. 궁금한 걸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두분을 많이 괴롭혔다. (웃음) 촬영 전에 자주 만났고 기본 10시간 넘게 대화가 이어졌다. 회의 풍경을 묘사해보자면 내가 해영이의 의도는 A일까 B일까라고 물으면 감독님들이 A는 맞고 B는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런 조각조각의 답들을 계속 모아 인물의 윤곽을 잡아나갔다.
- 소현의 양면성을 민과 해영이 나눠 맡았다. 민이 극도로 어두운 쪽이라면 해영은 지나치게 밝은 쪽이다. 해영은 어린아이 같은 느낌마저 드는데 어떠한 상을 염두에 두었나.
감독님들은 아기 사자라고 부르시기도 했는데, 어린 시기에 멈춰 있는 성인처럼 보였으면 했다. 성인이 아이같이 행동했을 때 감지되는 이상한 느낌이 있지 않나. 그런 느낌을 살리면 추리 게임 중인 관객을 재밌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귀여움은 혼자 살던 해영이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을 거다. 귀여운 사람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는 걸 알고 귀여움을 학습해 때마다 유용하게 써먹지 않았을까 싶다. 스타일링 컨셉은 소년과 소녀 사이의 경계에 있는 톰보이였다. 거기서 오는 미스터리함이 있을 것 같았다. 해영이라면 동묘 시장 같은 곳에서 산 옷가지들과 어디서 가져온 남의 옷들을 믹스매치해 입었을 것 같아서 빈티지함을 살린 룩을 완성했다. 의상, 분장팀과 함께한 이 과정이 특히 재밌었는데 핑크 니트는 강력한 내 아이디어였다.
- 앞선 인터뷰에서 권유리 배우가 이설 배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주어 현장에서의 유연함을 배웠다고 말했는데, 답장을 부친다면.
내가 의견을 낼 때마다 유리 언니가 엄청난 지지를 보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현장에서 그냥 “이건 어때요?”라고 훅 던졌을 때 바로 이어서 더 큰 무언가를 만들어낸 언니야말로 정말 유연한 배우였다. 유리 언니, 사랑해! 이 말을 꼭 살려달라. 직접 말하긴 부끄러우니 나중에 기사를 보여주겠다. (웃음)
-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해외 관객들을 만났다.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한 적 있는데 지금은 어떤 추억으로 남아 있나.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자유로운 태도가 여전히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극장에서 와인 잔 하나씩 들고 대화하고 손뼉도 치면서 영화를 보는데 예술에 대한 사랑이 가득 느껴졌다. 나도 어떤 작품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감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어디로 돌려도 보이는 몇 백년 된 조각상, 차보다 자전거가 우선시되는 거리 풍경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 본인을 소개하는 콘텐츠에서 ‘나는 제일 좋아하는 게 정말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 게 인상적이었다. 최신판 제일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공유해준다면.
사람에게 애정을 많이 느끼는 시기인가보다. 함께 영화 일정을 소화해주고 있는 소속사 직원들, 영화를 보고 좋았다는 말을 건네는 분들 모두에게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특히 <침범>팀. 이번 영화에서 같이 연기한 선배님들에게 많은 응원을 받으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나를 믿을수록 캐릭터와 하나가 되는 드물고 귀한 순간을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작품을 부지런히 해보려 한다
공통 질문
1. 아무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하루가 주어진다면?“평소에도 그런 편이라 보통의 일상과 똑같이 보낼 것 같다. 요즘 기준으로 오전 10시쯤 일어나 운동 가고 책 읽고 밥 한번 해먹으면 금세 밤이다. ‘시간 진짜 금방 가네’라는 말을 매일 하는 것 같다.”
2. 이설이 직접 추천하는 이설의 출연작“너무 어렵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웃음) 공평하게 첫 영화, 첫 드라마를 꼽겠다. 지금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영화는 민규동 감독님의 <허스토리>. 배우 이설의 시작이 되어준 작품이다. 드라마는 <두여자> 시즌2. 매회 엔딩에서 춤을 춰서 떠올리면 정말 부끄러운데 그래도 내가 궁금한 분들에게만큼은 보여드리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