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추모] 1969년부터 2022년까지, 강수연이 걸어온 길
2022-05-13
글 : 이자연
그렇게 영화가 되었다

어떤 영화는 특정 시간을 그대로 복제해 간직한다. 예전과 다른 거리 풍경, 지금은 쓰지 않는 통신기기들, 그리고 이젠 곁에 없는 사람까지. 강수연의 필모그래피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서 그가 영화사에 남긴 의미를 조각 모으듯 하나씩 맞춰봤다. 그를 간직하고 있는 영화들의 이야기.

<똘똘이의 모험>(1971)

<똘똘이의 모험>(1971)

강수연은 동양방송(TBC) 전속 연기자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똘똘이의 모험>은 1946년에 제작된 동명의 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드라마로, 본격적인 어린이 드라마 시대를 열었다. 모험심 많은 어린이들이 힘을 합쳐 새총으로 악당을 혼내주는 권선징악형 이야기. 그중 이쁜이 역을 맡은 강수연의 명랑한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W의 비극>(1985)

아역배우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선택한 강수연의 성인 데뷔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W의 비극’이라는 연극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혜미는 연습 중 상우와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배우로 거듭난 혜미를 질투한 라이벌 소연이 칼로 찌르려 하자 상우가 나타나 대신 찔리면서 진실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성숙한 내면 연기를 통해 성인 연기자로 나아가는 과정을 잘 통과했다는 평이 많았다.

<씨받이>(1987)

<씨받이>(1987)

조선시대 명문가의 씨받이가 된 주인공 옥녀역을 맡았다. 당시 파격적인 장면이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이에 강수연은 <밤으로 가는 쇼>에서 “연기는 누군가의 인생을 흉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삶을 이해하기 위해선 뭐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두번 생각하지 않고 한다”고 머뭇거림 없이 답하기도 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동아시아 배우 최초라는 위대한 기록을 세웠다. 출산 장면을 사흘 내내 촬영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감성적인 신문방송학도 철수와 영어라곤 조금도 못하는 영문학도 미미의 좌충우돌 캠퍼스 이야기. 영화 예고편 속 이런 자막이 눈에 띈다. ‘말로 할 것도 주먹으로 하는 도시의 야생마 미미.’ 새침하고 괴팍하고 유쾌한 강수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2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최고 흥행 한국영화로 떠올랐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자신을 떠난 아버지 윤봉 스님과 돈과 성적 욕망에 눈이 먼 어머니, 현종 선생과의 오해로 인한 이별 등 속세의 아픔을 잊으려 여승이 된 순녀를 연기하며 강수연은 직접 삭발을 감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 결과로 대종상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안긴 계기가 되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이문열 작가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사랑에 빠진 고시생 형빈과 여대생 윤주는 형빈의 아버지에 의해 헤어진다. 둘은 미국에서 우연히 만나지만 일련의 다툼으로 형빈이 수연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형빈이 수연에게 죽기 전에 한 말이 진실인지 죽어가면서 한 말이 진실인지 묻는 마지막 장면에서 긴장감이 극에 달하고 관객은 자신만의 답을 내리게 된다. 영화에서 자주 춤을 선보였던 강수연은 이 작품에서도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춰야 했는데, 유흥에 젖어 흥청망청대는 윤주의 광란을 눈을 뒤집어까면서 표현한 장면은 24살 배우의 연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노련하고 기술적이었다.

<그대안의 블루>(1992)

결혼식장에서 탈출해 웨딩드레스 끝자락을 마구 잘라내는 유림은 일과 사랑 모두 양립하고 싶은, 자신이 가장 소중한 인물이다. 안성기 배우가 맡은 호석 또한 직업인으로서 유림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길 기대한다. 여성에게 일과 사랑 중 한 가지 가치만 선택하도록 요구하지 않아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이 많다. 당시 강수연은 한국 연예계에서 최초로 억대 개런티를 받은 여성 연예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웨스틴 애비뉴>(1993)

아버지의 강압에도 의대를 그만두고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 드라마 스쿨에 입학한 지수를 연기했다. 생기 넘치고 야망 있는 강수연을 엿볼 수 있는 작품. LA 폭동 1년 뒤의 영화로 이 사건에 대한 당대의 시각이 그대로 담겼다는 평을 들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공지영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가정폭력을 버티지 못해 이혼한, 이제는 작가로 홀로서기하려는 혜완을 맡았다. 이 시기 강수연은 <그 여자, 그 남자>(1993), <장미의 나날>(1994) 등에서 사회의 요구에 쉽게 굴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을 주로 연기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빨리 결혼하고 싶은 연, 일과 사랑 모두 정렬적으로 탐구하길 좋아하는 호정,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게 꿈인 순. 자유로운 연애관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말할 줄 아는 호기로운 세 친구의 이야기다. 1998년에 제작되었지만 현재의 관점으로 봐도 무디지 않은 가치관이 느껴진다.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호정을 연기하는 강수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인천하>(2001)

<여인천하>(2001)

영화는 아니지만 강수연의 필모그래피에서 <여인천하>를 빼고 말하긴 어렵다. 박종화 작가의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작품. 2001년부터 2002년 중반까지 무려 1년 반 동안 방영된 대하 사극으로, 야망 넘치는 여성들의 암투를 흥미롭게 다뤘다. 특히 강수연은 천하를 쥐고 흔든 실권자의 부인을 날카롭고 지략적인 모습으로 연기하며 대중에게 호평받았다.

<한반도>(2006)

남북 정상이 경의선을 복원하며 개통식을 열려는 순간, 일본은 대한제국 때 체결한 조약을 근거로 경의선을 개통할 수 없다며 가로막는다. 이 문제로 정부는 고종의 숨겨진 진짜 옥새를 찾아나서는데, 이 과정에서 강수연은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로 카메오 출연했다.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절도 있는 목소리와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오랜 여운을 남겼다는 평이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간담회에서 강수연의 카메오 출연을 두고 “강수연 배우는 단 한컷만 나와도 <한반도>의 여자주인공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주리>(2013)

<주리>(2013)

24분짜리 단편영화.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의 감독 데뷔작으로 영화제 심사위원 5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기 영화에 대한 애정도 정의도 달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결국 심사위원들의 묘한 갈등은 극에 달하고 서로의 감정이 폭발하는 영화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편하고 유쾌하게 흘러가 허허실실 웃으며 보기 좋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강수연의 영화를 향한 사랑과 자기만의 태도가 은은하고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정이>(2022)

연상호 감독과 함께 촬영한 SF 장르영화. 기후변화로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진 인간들은 피난처를 만들지만 그 안에서 결국 내전이 발생하고 만다. 무수한 갈등 속에 전설적인 용병 ‘정이’의 뇌복제 로봇을 성공시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뇌복제 및 AI 기술 연구소 팀장인 서현을 맡은 강수연의 모습을 곧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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