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뤽 고다르의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그의 삶과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잊고 있던 그의 영화 세계의 광활함과 비범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언젠가부터 그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보다 앞서 어느 먼 미래에 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드라마틱한 변화들로 점철된 그의 영화 여정에서 누벨바그 영화들을 따로 떼어내 살펴보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한 한계를 전제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그의 영화의 출발점이자 어쩌면 가장 특별한 시기일 수도 있는 누벨바그 시기에 대해 잠시 되돌아본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언제나 영민한 청년이었던 그를 기억하면서.
태초에 위반이 있었으니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물결’을 뜻한다. 누벨바그라는 명칭은 1957년 프랑스의 한 주간지에 의해 우연히 사용되었지만, 트뤼포의 말처럼 그 명칭의 탄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벨바그가 태동할 즈음 프랑스 문화예술계 전반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문학에서는 로브그리예가 이끄는 누보로망이, 연극에서는 베케트와 이오네스코를 중심으로 한 부조리극이 전통적인 형식들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표현 방식들을 모색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도 무언가 나타나야만 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시스템을 모방하기에 급급한 당시 프랑스 주류 영화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결국 샤브롤, 트뤼포, 고다르 등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출신의 젊은 감독들이 그 역할을 자임한다.
누벨바그의 주역들 중에서도 고다르는 ‘누벨’(새로운)이라는 수식어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기존의 모든 영화 관습들을 타파하려 했고 모든 영화 형식들을 혁신하려 했으며, 기성세대의 고정관념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1960년에 발표한 첫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부터 점프컷, 카메라-시선, 핸드헬드 카메라 등 이전 영화들에서 볼 수 없던 파격적인 기법들을 선보였고, 이후로도 수평 트래킹숏, 비연속적 몽타주, 파편화된 서사 등 낯설고 불친절한 형식들을 거리낌 없이 구사했다. 또 표현의 혁신을 위해 소형 카메라, 고감도 필름, 휴대용 동시녹음기 등 다양한 기술적 혁신들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늘 관객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고전적 양식과 새로운 기법 사이의 조화를 추구한 트뤼포와 달리, 고다르는 영화마다 도발에 가까운 실험들을 감행한 것이다.
부단한 전복과 위반. 고다르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이 표현은 고다르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범주 안에 머물렀던 누벨바그 시기를 지나 소규모 정치영화에 몰두하고, 비디오와 TV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소니마주’(SonImage) 시기와 관조적 영화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문자와 이미지와 소리의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긴 영화 여정. 변화와 혁신으로 이어진 그 여정의 이면에는 스스로에 대한 위반, 즉 자신이 만든 영화들과 자신이 구축한 영화적 스타일에 대한 끊임없는 전복과 위반의 의지가 있었다. 수많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영화와 제작 방식에 대해 비판했고, 심지어 새로운 작품을 통해 기존 작품의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고정되고 정착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야말로 고다르라는 한 인물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것이다.
“태초에 위반이 있었으니….” 바타유는 <성경>의 첫 구절을 비틀어 예술가의 숙명인 위반에 대해 표현했다. 모든 경계를 넘어서고 모든 정의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마저 위반하려 했던 고다르. 그는 영화인이기 이전에 예술가였고, 그런 자신의 숙명에 평생 동안 충실했다.
고다르, 현대영화의 몽테뉴
고다르의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은 때때로 지식인의 자의식으로 변모되어 나타났다. 문학, 회화, 음악, 연극, 철학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에 해박했던 고다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영화 안에 최대한 드러내려 했고, ‘인용과 암시’를 그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가령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영화 <말타의 매>와 르누아르의 그림이, <미치광이 피에로>에서는 랭보의 시와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셀린의 소설이 인용되거나 암시되었고, <여자는 여자다>에서는 트뤼포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와 <쥴 앤 짐>뿐 아니라 자신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소환되었다. 간혹 이러한 인용과 암시는 너무 과도하고 장황해 단순한 과시로 다가오기도 했고, 늘 지식의 최전선에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엘리트 지식인의 현학적 태도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고다르의 인용과 암시는 영화 안에 다층적인 발화 차원을 구축하기 위한 그만의 특별한 전략이었다. 누벨바그 시기에 고다르가 시도한 영화 작업의 한축은 분명 다채로운 표현양식을 갖춘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끊임없는 탈주와 변주를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균형과 종합을 추구했다. 뮤지컬(<여자는 여자다>), 전쟁영화(기관총 부대>), 범죄물(<네 멋대로 해라>), SF(<알파빌>) 등 고전적인 영화 장르의 관습들을 비틀고 희화화하면서도 장르영화만의 고유한 매력을 부각시키려 애썼고, 파격적인 실험을 거듭하면서도 인지도 높은 배우들의 기용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려 했다. 또 첨예하게 대립하던 당대 논쟁에서 벗어나 몽타주와 미장센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주장했고, 다큐멘터리 양식과 픽션 양식의 적절한 교합을 추구했으며, 오랫동안 영화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머물렀던 사운드의 위상을 복원해 영화를 ‘보는’ 매체이기 이전에 ‘듣는’ 매체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고다르의 이러한 균형과 종합의 노력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힌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이 조화보다 더 우세한 경향으로 나타나고 단속성과 파편화가 그의 영화의 주요 원리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서 그의 영화는 더욱더 개인적인 작업이 되어간다. 사실, 누벨바그의 근간인 작가주의가 처음부터 영화를 집단 창작이 아닌 한 ‘저자’(auteur)의 개인적 작업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고다르는 영화란 개인적 표현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애초의 생각에 더욱 충실하면서, 사변적이고 사적인 영화들로 누벨바그의 말기를 채워간다. 아울러, 그의 영화의 에세이적인 성격도 더욱 강화된다.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으면 에세이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밝힐 만큼 고다르는 규범과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에세이 장르에 일찍부터 매료되었다. 문학 장르 에세이(essay)는 시도, 도전을 뜻하는 프랑스어 ‘에세’ (essai)에서 비롯된 것으로, 16세기 프랑스 지성의 상징인 몽테뉴에 의해 시작되었다. 몽테뉴가 성에 칩거하며 일상을 비롯한 세상만사에 대해 자유로운 형식으로 쓴 글들의 모음집 제목이 바로 <에세>였다. 단편영화 시절부터 고다르의 영화는 영화이자 동시에 영화에 대한 단상이었고, 그의 영화의 비평적 에세이 스타일은 누벨바그를 거치면서 더욱 공고해진다. 누벨바그의 끝에서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라는 꿈은 버렸지만, 대신 ‘영화-에세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창안하면서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모든 장르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형식적 변주를 담아낼 수 있는 영화-에세이 양식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길을 열어준다.
영화 에세이스트의 자기 성찰적 시네마토그래피
고다르의 영화-에세이는 필연적으로 영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가 흔히 ‘자기 반영성’(self-reflexivity) 영화의 모델로 꼽히는 것은, 영화마다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해 성찰하고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누벨바그 영화들에서 그가 했던 모든 전복과 위반의 시도들도 근본적으로는 영화 매체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시도했던 다르게 찍기, 다르게 이어 붙이기, 다르게 보여주기의 근저에는 그의 표현처럼 ‘다르게 생각하기’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다르는 영화에 대한 자기 성찰을 위해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도입한다. 브레히트가 연극에 대한 자기 성찰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연극의 혁신을 위해 시도했던 서사극의 생소화효과(Verfremdungseffekt) 기법들이 영화의 혁신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시도한 생소화효과 중 일부는 브레히트의 생소화효과 기법들을 그대로 영화에 적용한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와 <여자는 여자다>에서 배우들이 연기 도중 관객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거나,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노래가 이야기의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경멸>을 비롯한 많은 영화들에서 자막을 삽입해 영화의 발화를 분산시키는 방식 등이 그에 해당한다. 또한 브레히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고다르가 창안하거나 발전시킨 순수하게 영화적인 생소화효과들도 있다. 점프컷, 플랑세캉스, 탈프레임화, 수평 트래킹숏 등이 그것이다. 특히 <주말> 등에서 선보인 장시간의 수평 트래킹숏은 화면의 깊이감을 제거해 영화 이미지의 삼차원적 환영을 깨뜨렸고, 영화 안에 실재와 유사한 공간을 구축해 관객의 의식을 종속시키려는 상업영화의 전략을 저지했다. 고다르의 영화들에서는 영화 제작과정의 모든 기술이, 즉 시네마토그래피 전체가 영화에 대한 자기 성찰의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고다르 영화의 이 모든 생소화효과들은 관객의 능동적인 관극 행위를 요구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시에 사유해야 하고,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동시에 그것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고다르는 생소화효과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관객을 영화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떼어놓았지만, 그와 동시에 관객을 영화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에 초대했다.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그의 모든 시네마토그래피는 관객과의 대화를 위한 장치이자 영화에 대한 사고로 관객을 유혹하기 위한 도구였다. 관객은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을까? 이 낯선 초대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들쑥날쑥했지만, 적어도 누벨바그 기간 동안 그의 영화는 전세계 수많은 관객의 영화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수동적으로 영화의 서사에 끌려다니던 관객에게 강렬한 충격을 안기면서 다르게 보기와 다르게 생각하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부유하는 푸른 잿빛 청춘
영화-에세이를 통한 고다르의 성찰은 영화 자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누벨바그 시기에 그의 성찰은 자주 예술 자체의 역할과 의미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고, 한편으로는 현실과 사회의 문제들에도 주목했다. <작은 병정>에서는 당시 프랑스영화계의 암묵적 금기를 깨고 알제리 식민 전쟁에 대한 집단적 침묵과 국가적 폭력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다루었고, <비브르 사 비>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서는 현대사회에서의 성매매와 성의 상품화 문제를 묘사했으며, <경멸>에서는 철저하게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영화산업의 현실을 그려냈다. 그런데 누벨바그 시기의 고다르가 좀더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어쩌면 정치·사회적 문제들보다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 자체일지 모른다.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에 짓눌린 이들, 생의 의지와 현실의 불합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방황하는 이들이야말로 그의 영화의 진정한 성찰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함께 있어도 항상 서로로부터 소외되고, 끊임없이 수다를 나누지만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부조리 연극에서처럼 인물들간의 대화는 끝없이 겉돌 뿐이며, 서로의 언어와 몸짓을 따라 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므로 단속적이고 분산적인 고다르 영화의 모든 형식들은 단지 전복과 위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들’의 파편화된 내적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뚝뚝 끊기는 점프컷과 되풀이되는 숏들 사이의 단절, 흔들리거나 텅 빈 프레임 등은 불안정하고 마모된 인물들의 의식을 표상하고, 길게 늘어지는 이동숏과 한없이 지연되는 서사는 인물들이 겪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삶의 권태를 나타낸다.
특히 청춘은 그의 누벨바그 영화들에서 가장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 고다르는 그의 영화들에서 청춘의 생기를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그 자신이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이었던 고다르는 동시대 청년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으로 청춘의 활기, 무모함, 역동성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장폴 벨몽도와 아나 카리나의 가볍고 유연한 몸짓은 화려한 원색의 화면에서도, 차분한 흑백의 화면에서도 생동하는 청춘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영화에서 청춘은 기성세대보다 더 고독하고 처연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지만, 이미 세상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거대한 권력과 보이지 않는 음모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단순한 행위들의 무한 반복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사회의 불합리와 생의 부조리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청춘, 공허와 절망에 짓눌린 채 이리저리 세상을 떠도는 청춘. 그 방황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아무런 희망 없이 떠밀리듯 살다가 포주의 총에 맞고 길거리에 버려지는 <비브르 사 비>의 나나, “발 없는 새”처럼 세상을 떠돌다가 갱단의 총에 쓰러지며 마침내 안식을 찾는 <국외자들>의 아르튀르, 그리고 정처 없이 프랑스 남부를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얼굴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르고 스스로 생을 폭파시키는 <미치광이 피에로>의 피에로처럼.
고다르가 시도한 모든 변화는 필연적이었고, 그의 영화의 모든 시기가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만큼 중요하지만, 우리의 심장에 가장 큰 흔적을 새긴 것은 그의 누벨바그 영화들이다. <미치광이 피에로>의 한 대사처럼, 고다르의 누벨바그 영화들에서 삶은 “슬프지만 아름다웠고”, 아름답지만 슬픔으로 배어 있었다. 생기 넘치지만 쓸쓸하고, 푸르게 빛나지만 잿빛으로 맴도는 그의 영화 속 장면들은 이후로도 시간을 가로질러 세상 어디선가 영원히 떠돌고 있을 것이다. 펠리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벤더스가 <리스본 스토리>에서 건넨 인사처럼, 아듀(adieu) 대신 차오(ciao)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보낸다. 곧 다시, 분명 수없이, 그를 다시 만날 테니까. 차오, 장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