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형사록' 이성민, “노련한 승부사”
2022-11-09
글 : 김수영

앞머리를 바짝 민 헤어스타일, 부릅뜬 눈매에서 서늘한 매서움이 풍긴다. 이성민은 오랫동안 낡은 외투와 큰 바지를 입어온 사람처럼 거리감 없이 <형사록>의 김택록이 되었다. 50여편의 영화와 30여편의 드라마를 찍었지만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영화나 드라마가 공개되기 전날이면 잠 못 들고 뒤척인다. 인터뷰 날도 새벽 2시쯤 간신히 잠들어 이상한 꿈에 뒤척이다 세 시간 만에 깼다고 했다. 술도 즐기지 않고 몇 가지 운동을 하러 가는 것 외에는 집 밖을 잘 나가지 않는다는 그에게서 외골수 형사 택록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택록이 이야기 끝에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낼 거라고 믿는 것처럼, 이성민의 말을 들으면 스크린을 통해 앞으로도 꾸준히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그가 말한 대로, 평생 연기했고 지금도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로버트 드니로처럼.

-<형사록>의 원래 제목은 <늙은 형사>였다고.

=제목의 ‘늙음’ 때문에 힘들었다. 극적으로 늙은 형사에 가깝게 보이려고 했는데 제목이 바뀌고 티저를 보고 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웃음) 머리는 약간 흰 칠을 하고, 이마는 원래 넓은데 더 깠다. 택록이 방 안 여기저기에 일기장이나 옛날 자료를 쌓아두고 사는 것처럼 옷도 옛날 것을 그대로 입고 있을 것 같더라. 바지도 크게 입고 올드한 의상으로 늙은 형사를 그려내려고 했다.

-이번이 세 번째 형사 역할이다.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17년차였고 <비스트> 때는 강력반 에이스, <형사록>에서는 30년차 베테랑 형사가 됐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어느 우주에선 이성민 배우가 계속 형사로 살고 있을 것 같다. 이전과 다른 형사 택록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점을 고민했나.

=언제나 출발 지점은 비슷하다. 직업보다 그 캐릭터의 기질을 먼저 파악한다. 형사라서 의사라서 어떤 성격을 갖는다기보다 이런 사람이 의사고, 그런 사람이 형사가 됐다고 접근한다. 그런 지점에서 택록이 가진 핸디캡이나 경험한 과거가 그만의 캐릭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트라우마 때문에 앓고 있는 공황장애나 국진한(진구)과 대비되는 체력적인 한계 같은 것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택록은 차 안에서 ‘친구’의 전화를 받고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된다. 상황을 파악한 택록은 분노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친구’에게 “철저하게 준비했네”라고 말한다. 노련한 승부사로서 택록의 캐릭터가 선명해지는 지점이었다.

=그 장면이 굉장히 어려웠다. 감정적으로는 흥분한 상태인데 ‘친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름 숙제였다. 냉정하게 보이지만 시청자가 택록이 굉장히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알아채야 해서 연습을 많이 했다. 카 체이싱을 먼저 찍고 차 안에서의 통화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크로마키로 촬영했다. 감독님이 설계한 자동차의 동선 영상을 보면서 어느 지점에서 다른 차를 추월하는지 어디서 방향을 돌리는지 잘 기억해두었다. 대사를 치는 순간이나 호흡 피치를 올려야 하는 순간까지 계산하고 연기한 기억이 난다.

- 택록은 ‘친구’를 추적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과 시간을 치열하게 되돌아본다. 이제까지 연기 생활을 쭉 되새겨본 적이 있나.

= 2019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자리였던 것 같다. 자리에 앉아 혹시 상을 받으면 어떤 말을 할까, 수상 소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내가 어쩌다가 여기 앉아 있지 싶더라. 잠깐이었지만 그 순간부터 역으로 이 일을 시작했을 때까지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우연과 많은 인연이 있었나 싶었고 이 모든 게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들었다. 좋은 인연이든 예전에 헤어진 나쁜 인연이든 그 모든 것이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작용했구나. 그날 수상 소감을 말하는 무대에서도 이런 얘기를 했다.

-마치 택록의 <형사록>처럼 <씨네21>엔 이성민 배우의 인터뷰 어록이 아카이빙되어 있다. 2008년 <고고70> 출연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한신을 책임져본 경험이 없어서 부담스러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한편의 영화와 하나의 시리즈를 이끄는 배우가 됐다.

=이 일을 영원히 즐기지 못할 거다. 촬영 자체는 즐겁지만 우리끼리 즐겁자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 관객에게도 좋을까, 늘 긴장하며 일한다. <공작> 때 자존감이 바닥을 치도록 힘들었는데 대화를 나누다보니 배우도 감독도 스탭도 똑같이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다들 고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배우가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영화가 잘 나오도록 애쓰느라 힘들었던 거다. 그걸 알고 나니 외롭지 않더라. 그전에는 오로지 내가 책임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슛 들어가기 직전이면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압박감을 느꼈다. 현장은 같이 고민하고 같이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졌다.

-형사 택록이 사건을 풀어나갈 때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 염려하지 않듯이 배우 역시 경험치를 바탕으로 능숙하게 연기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스로 기준이 높아서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주변에 잘하는 배우들이 나올 때마다 여전히 긴장된다. (웃음) 어릴 때는 바닥을 치는 때가 자주 있었다. 이래서 나는 어떻게 연기를 하나 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떤 계단은 끝없이 직선으로만 나 있고 어떤 계단은 끝이 안 보이는 절벽처럼 느껴지곤 했다.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것도 힘들었는데 나이 들수록 아무도 나에 대해 평가를 안 해준다. (웃음) 싫은 소리는 안 해준다는 얘기지. 이제는 스스로 깨쳐야 되는데 그게 어렵다. 그래서 나이 50 때 <공작>을 통해 바닥을 겪어본 게 이제 와서 보면 좋은 경험이었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도전을 계속해왔다. 로봇이나 동물과도 연기했고, 훨씬 나이 든 역할도 맡았다. 여느 영화의 카메오 출연도 마다하지 않아 누구보다 관객과 부지런히 만나는 중이다. 동력이 뭔가.

=미련이 남으니까. 다음에는 잘해봐야지, 그런 마음이 다시 한편을 시작하게 만든다. 도전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편이다. 대본 속 캐릭터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또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나을 것 같아서 거절한 적도 많다. 앞으로는 이런 지점을 피하지 않고 극복해나가고 싶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배우로 꼽는 로버트 드니로가 얼마나 많은 영화를 찍었는지 아나? 100편이 훌쩍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우리는 명작만 기억하지만 그는 평생 연기했고 지금도 연기하면서 자신만의 필모를 쌓아가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작품도 수없이 출연했다. 그래! 저런 게 아닐까! (웃음) 옛날 선배들이 연기가 끝없는 길이고 구도의 길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연기는 그렇게 평생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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