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액체에서 저항까지
2022-12-08
글 : 김예솔비
전시장에서 영화관으로, <멜팅 아이스크림>의 경우

'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이 없다면 모든 게 신이 될 것이다.' _<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멜팅 아이스크림>

한때 성역처럼 여겨지던 역사의 시간이 있다. 1986년 광장에서 민주화를 이끌던 주역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 많던 이들은 광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민주화의 꿈도, 혁명의 이상도 모두 실패로 녹아내리고, 액체는 부패하고 있다. 누군가 외친다. 시간을 거슬러보자고. 비호받던 시간들의 영광을 다시 품에 안아보자고. “깨끗한” 시간으로 되돌아가자고.

아카이브 사료들 사이에서 수해로 소실된 줄 알았던 필름들이 발견된다. 민족사진연구회 박승화는 이것이 어쩌면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진격 같은 항쟁의 장면들을 촬영한 A컷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필름을 복원하려 한다. 이와 같은 도입부에서 어쩌면 관객은 사진의 복원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역사를 되짚는 친절한 역사서 같은 영화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멜팅 아이스크림>은 반대로 복원 작업으로부터 자꾸만 거리를 두려 한다. 영화는 복원의 과정을 가까이서 중계하기보다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려 한다. 그러므로 관객은 왜 이들이 필름을 복원하려고 하는지, 복원된 기록사진을 통해 궁극적으로 복원하려는 시간은 대체 무엇인지 의문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를 이끄는 것은 복원의 여정이 아닌, 복원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멀어지려는 힘’을 추동하는 또 다른 축은 영화에 지속적으로 끼어드는 2000년대 디지털 아카이브 푸티지다. 지금은 관리의 어려움으로 사라졌지만, 한때 <미디어 참세상>에서 카피레프트 정책을 따르며 개재된 영상들에는 노동자들의 절규와 몸부림으로 점철된 투쟁의 시간이 남아 있다.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 비정규직 보호법 제정과 같은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물러설 수 없는 사지로 내몰았다. 저화질의 픽셀들로 무수히 산화되는 디지털 영상들은 80, 90년대 민주화운동을 회상하는 사진작가들의 인터뷰와 훼손된 필름을 복원하는 장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단선적인 역사 진술에 훼방을 놓는다. 디지털 영상 속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생동하는 몸짓으로 비가시의 역사를 표명하며 민주화 운동가들이 복원하려는 역사를 향해 의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오랫동안 사진 매체로 작업을 해왔던 홍진훤 작가는 사진을 촬영하듯 동시대의 거리, 군중, 동상, 사물들의 이미지를 영화 곳곳에 끼워넣었다. 이 이미지들은 복원과 복원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힘 사이에서 느릿하게 진동하며 두 힘을 병치시키는 사진작가로서의 본인의 위치를 조용히 관철한다. <멜팅 아이스크림>에서는 역사를 복원하려는 힘과 멀어지려는 힘이 서로 부대낀다. 시간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주인 없는 역사는 흩어지며, 영원히 악몽 한복판일 것만 같다.

정말 완벽한 패배들

홍진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멜팅 아이스크림>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실패기”다. 녹아내리던 사진들을 불온전하게나마 복원했지만 기대하던 A컷이 아니었다. 사진 복원도 실패했고, 디지털 아카이브 영상에 등장하는 모든 투쟁들 또한 패배했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촛불의 짤막한 승리 이후 다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민주화 세대는 또 한번 거대하게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긍정과 희망의 기운 없이 실패 속에 갇혀 있는 “루프 안의 답답함”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기승전결을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실패만을 답습하고 있는 영화의 리듬은 그 자체로 루프와 같은 정체의 감각을 자아낸다. 운명도 지평선도 없이 실패하는 존재들. 그러나 작가는 그럼에도 이 실패들 속에서 무언가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정말 완벽한 패배들”을 쌓는 일만이 루프 바깥의 내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프에 갇힌 <멜팅 아이스크림>의 시간성은 60분마다 루프되는 스크리닝의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멜팅 아이스크림>은 극장 상영 이전에 전시장 d/p에서 영상 설치 작업으로 상영되었음을 상기해야겠다(이전 기사 참고).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목이 부러져 고개가 바닥으로 고꾸라져 있는 거대한 공룡 조각상을 촬영한 사진이다. 우리는 아직 영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는, 설명할 수 없는 파산의 감각만은 확실히 지니게 된다. 스크리닝은 정시마다 시작되므로 아직 정각이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영상이 상영되는 블랙박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자면 안쪽에서 고조되는 사운드와 아우성이 흘러나오고, 아직 보지 못한 영상의 비밀스러움 속에서 심장은 조금씩 상기된다. <멜팅 아이스크림>을 전시장에서 보는 일은 이러한 감각들의 교묘한 합작과도 같다. 반복되는 실패들의 누적이라는 루프의 시간성은 이 전시 공간을 지탱하는 세계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멜팅 아이스크림>이 ‘장편영화’라는 관습적 분류를 달고 극장의 납작한 스크린에 들어설 때 관람의 자유로움이 제한된다는 우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극장에는 사진들도, 영화의 일부를 미리 엿들으며 궁금증에 잠기는 상념의 순간들도 허용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극장에서 영상은 루프되지 않는다. 선형적인 시간 질서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루프라는 세계의 형식을 어떻게 호소할 수 있을까? 완벽한 실패들의 반복만이 그 반복을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멜팅 아이스크림>의 희망의 가정법을 어떻게 관객과 공유할 수 있을까? 주의를 돌릴 수 없이 스크린에만 고정해야 하는 관객의 시선, 이미지와 관객의 관계는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는 권력이라는 문제와 겹쳐진다.

극장이 경계해야 하는 것

전시장과 비교했을 때 극장에는 관람의 자유가 없다는 진단에 대응할 수 있는 뾰족한 정답은 없다. 그보다는 <멜팅 아이스크림>을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발견했던 사소한 장면 하나를 언급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해볼까 한다. 비 내리는 날,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꼭대기에서 위태롭게 농성을 하고 있다. 홀로 주저앉은 남자, 아마도 실패를 직감한 좌절의 자세는 명백하게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역사의 표상으로 우뚝 선 동상이 된 영웅들과 대비되는 운명의 형상이다. 그는 비탄에 잠겨 있고, 동료들은 지상에서 그를 애타게 달래고 있다. 이 장면에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이들을 촬영하고 있는 영상에 맺혀 있는 액체다. 아마도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이 묻은 것일 테다. 그런데 이때 표면에 맺힌 물방울은 액체가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화면 안쪽으로는 침투할 수 없다는, 그러니까 이 저항의 실패는 기꺼이 지켜질 수 있다는 이상한 희망의 방식을 느끼게 한다. 민주화의 영웅적 단면을 포착한 셀룰로이드 필름은 수해에 휩쓸렸다. 그러나 디지털 영상은 물에 젖을 수 없다. 이러한 가정 속에서 화면에 묻은 액체는 저항의 가능태를 띤다. 액체에서 저항까지, 단숨에 이동하는 관객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몽타주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극장의 경험을 변호하자면 선형적인 러닝타임이라는 길고 긴 인내 끝에 선물처럼 도달하는 이같은 발견의 순간이 얼마나 값진지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각자가 발견한 것들을 연결 지으며 각자의 상상 속에서 영화를 재몽타주하는 관객의 역량을 믿자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극장에는 <멜팅 아이스크림>과 같은 영화가 필요하다. 스크린과 마주 본다는 것, 이미지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의 육중한 무게를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극장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 사랑이 우리를 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며 가능한 저항의 자세를 떠올려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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