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역대급이다. 작품 속 안타고니스트를 지칭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수식인 ‘역대급 악역’이란 말을 <미끼>의 노상천(허성태)에게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건, 노상천의 사기 행각으로 양산된 피해자의 규모와 이에 얽힌 이들의 사연이 역대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껏 허성태가 연기한 숱한 악역과 비교해봐도 노상천은 역대급 악역이라 불릴 만하다. 허성태가 연기 커리어를 쌓으며 스스로 개발해온 캐릭터 빌딩의 노하우와 그 어느 작품보다 압도적인 서사상의 비중이 노상천에 육중하게 담겼기 때문이다.
- 과거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기가 작품에 도움이 될지 안될지가 배역 선택의 기준이라 밝힌 적이 있다. <미끼>도 그런 이유에서 선택했나.
=내가 이 역할을 해도 작품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끼>는 그보다는 내 도전 욕구에 의한 선택이라고 하는 게 더 맞다. 우리 드라마가 한 인물의 오랜 시간을 다루지 않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도 나이를 먹을 테고 그 속에서의 변화 지점을 내가 얼마만큼 디테일하게 잡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실제의 물리적 나이보다 많은 역할도 했고 동년배 연기도 해봤다. 노상천은 내 연기 커리어를 다 끌어모아 한 작품에서 오롯이 다 보일 수 있는 총집합이었다. 감독님이 내가 캐스팅 1순위였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나도 감독님께 지금까지 연기한 악역의 종합백과사전을 보여드리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 드라마의 모든 인물이 노상천을 연호하고 저주하며 궁금해한다. 말하자면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가 노상천의 존재감을 만드는 셈이다. 노상천의 존재감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감독님이 처음 작품에 들어갈 때부터 의상, 분장에서부터 힘을 많이 줄 거라고 언급하셨다. 지금껏 연기한 모든 배역 중 역대급으로 옷을 많이 갈아입고 분장도 정말 많이 했다. 촬영 전까지만 해도 시대별로 변하는 인물을 어떻게 변주할지 고민했는데 막상 옷과 분장을 착장하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의상, 분장 담당 스탭들의 노고가 크고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 연출자와 대화하며 캐릭터만의 고유한 디테일에 대해 자주 건의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미끼>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나.
=물론 모든 장면은 작가님이 써준 메커니즘을 기초로 감독님의 가이드라인을 통해 완성된다. 나는 거기에 조미료만 뿌리면 된다. 감독님이 오픈 마인드로 내 건의를 대부분 받아주셨다. 나의 경험에 의해 작품의 디테일을 잡기도 했다. 가령 대본에는 전략 추진팀과 전략 구성팀이 적혀 있었는데 회사 생활을 10년 해본 결과 회사엔 전략 기획팀만 있지 추진팀과 구성팀은 없다. 리얼리티를 위해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야기하는 편이다.
- 노상천의 내레이션이 많다. 이렇게까지 허성태의 목소리에 집중한 연출이 <미끼> 이전에 있었나 싶다. 특히 노상천이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오기 전 깔리는 카운트다운 장면은 목소리만으로 서스펜스가 생긴다.
=그 장면은 애드리브다. 작가님이 대사를 잘 써주시고 감독님이 나의 기지를 잘 받아주신 덕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장면이다. 그 장면에선 모든 것이 이미 내 손아귀에 있고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심리를 외현하고 싶었다. 당시 감독님이 내 애드리브를 들으시고 신이 나서 조금만 더 천천히 해달라며 애드리브에 대한 디렉션을 추가로 주셨다. 이렇게까지 작가와 연출, 배우가 죽이 잘 맞는 환경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가 강하고 센 표현이라는 인터뷰를 읽은 적 있다. 노상천은 그 반대다. 노상천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는 포효나 큰 액션에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직하고 차분하게 사람들을 회유한다.
=이전 역할들을 생각해보면 세거나 지질했다. 말하자면 그 중간에 해당하는 역할이 내게 잘 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끼>의 노상천은 에너지 레벨을 상중하로 모두 분배할 수 있는 배역이었다. 노상천은 추종자들 앞에서 영어도 비속어도 일부러 섞어 쓴다. 어차피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 앞에서 편한 모습을 보이고 그들 역시 심적으로 편한 상태를 만들고 싶었을 거다. 추종자들을 독려하고 다그치기 위한 노상천만의 전략이다.
- 악역 연기를 많이 했다. 서사 통념상 악인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데 악역을 자주 소화하면서 필멸의 순간을 연기할 때 오는 피로는 없나.
=전혀. 오히려 결말부에서 어떻게 망가져야 관객 혹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드라마 <인사이더>에서 이유영 배우에 의해 처단되는 결말을 촬영할 당시 망가지는 모습을 연기하려 얼굴에 힘을 너무 많이 줘서 마지막엔 얼굴이 퉁퉁 부었다. 그 상태로 찍으러 간 게 <SNL 코리아> 시즌2다. (웃음) 데미지를 입은 경우도 있다. <이몽> 촬영 당시 일제 앞잡이를 연기한 적이 있다. 포박된 청년 독립투사가 내 앞에서 애국가를 슬프게 부를 때 그 배우의 뺨을 때려야 했다. 카메라가 꺼진 후 너무 울컥하고 미안해서 혼났다.
- 다작 배우로 유명하다. 끊이지 않고 작품을 찍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어머니다. 내가 연기하는 걸 어머니께서 굉장히 좋아하신다. TV드라마 하나 끝나면 곧이어 영화가 개봉하고 영화가 극장에서 종영할 때면 다시 TV드라마에 나오고…. 공백 없는 사이클을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그 즐거움을 충족하고픈 마음뿐이다. 사실 어머니가 내겐 가장 신랄한 비평가다. 관객은 댓글을 달지만 어머니는 내게 바로 메신저를 날리신다. 하루 일과의 시작이 어머니께 전날 촬영한 모니터링 영상을 보내드리는 거다. <미끼>의 푸티지도 몇개 보내드렸는데 어머니의 반응은 “아이고 많이 늙었네”였다. (일동 폭소) 작품에서 누군가가 노상천을 향해 ‘털보’라고 지칭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그것도 어머니의 리액션에서 탄생한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