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의 10대들에게 마음을 쓰게 만드는, 학창 시절의 배두나는 어떤 얼굴이었나.
=우등생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규율은 착실히 따르는 모범생. (웃음)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늘 마음에 뭐가 많아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중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시험 점수별로 아이들을 구분해서 체벌하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60점 미만의 학생은 엎드려뻗쳐를 한 상태로 사정없이 맞았다. 다음날 새카매진 친구의 엉덩이를 보면서 엄청난 쇼크를 받았다. 도대체 아이들이 왜 맞아야 하지? 학교가 이래도 되나!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마음을 품고 학교를 다녔다.
- 예민한 문제의식의 소유자였지만 겉으로 티내지 못하다가 배우가 되어서 반항적인 이미지를 제대로 입었다.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내가 배우를 할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고, 늘 조용했던 애가 <복수는 나의 것>(2002)의 영미 같은 캐릭터로 나타나니까 황당해했다. <플란다스의 개>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은 지금은 물론이고 그 시절의 나 역시 정말로 좋아했다. 미성년 시절엔 발화할 수 없었던 것을 작품을 통해 표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얌전했지만 사실 안에서는 막 불이 끓고 있었던 거겠지. 그런 건 부모도 모를 수밖에 없다. <다음 소희>에서 소희의 부모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 방관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련의 얼굴들, 변명하는 어른들을 <다음 소희>는 유진의 시선을 빌려 노골적으로 쏘아본다. 격양된 유진의 감정이 동반된 시점숏도 인상적이다. 시나리오상에는 이런 장면들이 어느 정도로 묘사되어 있었는지 궁금하다.
=‘유진이 주위를 둘러본다’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말로 분노해서 씩씩거렸던 순간이라 시선 처리에 대해서 기술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모두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말뿐이라니. 점점 울분이 쌓여서 지방 교육청 장학사와 대치하는 장면에선 거의 폭발 직전으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도희야>에도 비슷한 지문이 있었다. ‘영남이 주위를 둘러본다.’
- 유진의 시선과 그에 상응하는 시점숏들 모두 직설적이다. 유진도 배두나도 아닌, 관객을 대리하는 시선처럼 느껴진다.
=<다음 소희>에서 가장 바랐던 효과다. 유진이 행동할 즈음에 관객은 이미 소희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내 몫은 가능한 한 선명하게 관객의 감정을 영화에 적시는 일이었다. 배우가 절제함으로써 관객이 능동적으로 느낌을 발견하도록 하는 연기를 좋아하지만 이번엔 무조건 날것의 감정으로 밀어붙였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분을 정확히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이미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런 가능성이 충분한 작품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유진이 부검 의뢰서 등에 서명할 때 보니 글씨체가 10대처럼 동그랗고 앙증맞더라. 푸석한 얼굴과 대조되면서 문득 풍파를 겪기 이전의 유진이 비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뒤늦게 스틸 속 자신의 글씨체를 확인하고는) 아하하하, 너무 웃긴다. 어디 가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해야겠다. 완전히 원래 내 글씨체 그대로 쓴 거다.
- 유진과 소희는 댄스 학원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먼저 맺어졌다. 상황이 녹록지 않은데 유진은 왜 굳이 춤을 추러 다녔을까.
=감독님에게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춤추고 싶은 마음이 거의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신나게 춤추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스트리트댄스도, 걸그룹 춤도 다 해보고 싶다. 20년 동안 배우 생활을 했다고 늘 무게잡고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유진은 오랜 시간 엄마를 간호하느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한 사람일 텐데 그래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두운 캐릭터지만 마냥 엄숙하지 않은 점도 좋았다. 지쳐 있지만, 여전히 욕망과 취향이 있는 여자다.
- 진심을 쏟은 작품과 헤어지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다음 소희>가 날것의 감정을 많이 끌어올린 작업이었다면 여운을 정리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듯한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강제적으로 헤어져야만 했다. 2022년 2월28일에 촬영을 끝내고 3월3일에 바로 <레벨 문> 촬영을 위해 할리우드로 떠났다. <다음 소희>와 너무도 다른 세상, 초거대 상업영화 프로덕션의 세계로 훅 끌려들어온 거다. (웃음) 넷플릭스 역대 최대 예산이라고 한다. 한동안은 이 간극 사이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외국에 혼자 영화 촬영을 하러 가면 나란 사람의 모드가 바뀐다. 일종의 독종 모드다. <다음 소희>가 현장에서 마음을 풀어헤치고 동료들과 온기를 나누는 작업이었다면 할리우드에 도착한 순간 냉혈한처럼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하면서 버텼다. 이 양쪽을 오가는 일이 나한텐 이상한 자신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