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관능적인 기다림과 불안: ‘단순한 열정’ 소설과 영화 나란히 보기
2023-02-02
글 : 신유진 (작가·번역가)
<단순한 열정>

연인들의 몸은 하나의 장소이고,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행위는 그 장소에 들어가려는 시도다. 사랑은 열어주고 여는 일, 내가 아닌 타자 안에 들어가 하나가 되기를 희망하는 일, 그 희망의 부질없음을 부정함으로 욕망하고, 욕망함으로 열렬히 열중하는 일이다. 그렇게 사랑은 몸이라는 장소를 발화점으로 ‘열정’이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내게 열린 곳이나 온전히 내 것일 수는 없는, 한시적인 그곳에서 지속성을 꿈꾸면서. 이런 마음을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타자를 욕망하는 사랑에 있어서 그 어떤 열정도 결코 단순할 수 없다. 오히려 단순해지는 것은 열정이 아닌,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어떤 열정은 삶을 축소시키고 지워버리니까. 여기, 그런 열정의 대범함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있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이자,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의 영화, <단순한 열정>이다.

“지난해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온 엘렌(레티티아 도슈)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엘렌은 한 남자(알렉산드르)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둘 사이에는 일종의 규칙이 생긴다. 그가 전화를 하고 그가 엘렌의 집에 와서 섹스를 하고 그가 떠나고…. 언제 다시 만날지는 알 수 없다. 여느 연인처럼 쉽게 연락할 수도 없다(그는 유부남이다). 엘렌의 일상은 그와 다시 만날 때까지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기다림은 점점 더한 갈증을 부르고 그의 육체를 탐닉하는 엘렌의 욕망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마침내 그녀의 일상을 무너뜨린다.

이 영화는 열정이 한 여자의 삶을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그린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엮인 일상이 정지되고 모든 감각은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영화의 프로타고니스트이자 안타고니스트는 열정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다니엘 아르비드는 한 인터뷰에서 원작의 아름다움을 ‘한 남자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에서 발견했다고 말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것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아니 에르노, 소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엘 아르비드가 말한 그것은 사치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사치’를 지켜보며 공감하거나 거부하거나 동경하거나 불편함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에게 질문하게 된다. 이 함정 같은 열정에 빠진 여자의 이야기가 내 안의 무엇을 건드리는가? 나의 무엇과 부딪치는가? 소설 속 ‘나’의 이야기가 현실의 ‘나’의 이야기로 건너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경험을 토대로 개인적인 것을 초월해 공동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아니 에르노 문학의 가치가 시작된다.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 <단순한 열정> 표지.

“나는 이 책에 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레티티아 도슈도 연기를 하면서 이것은 그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고요.” 아니 에르노의 충실한 독자이기도 한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의 이 발언은 <단순한 열정>의 감상법을 제안한다. 한 여자의 열정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는 것, 당신의 그 이야기가 열망, 거부, 관조, 그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 그게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열정의 모습을 비춰보는 일일 테니까.

1992년,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세상에 나왔을 때 문단과 독자를 가장 놀라게 했던 솔직함이 이 영화에서는 육체적 탐닉으로 표현된 듯하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문학을 ‘에로틱’이라는 한정적 수식어에 가두지 않고 영화적 언어로 표현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벗은 몸이 아닌 감정을 전하는 몸, 언어로서 기능하는 몸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소설이 가질 수 없는 영화만의 무기가 아니겠는가. 다니엘 아르비드의 카메라는 이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행위보다 감각에 집중했다. 포갠 살의 무게감, 맞닿은 입술의 감촉, 머릿결이나 피부를 드러내는 방식은 원작의 무심하다 싶을 만큼 꾸밈없는 표현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포토그래피적 요소를 살린 장면들이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화면을 꽉 채우는 배우의 절제된 표정과 움직임은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요소인 사진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사라진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사진의 역할 말이다. 어쩌면 모든 예술은 존재의 증언이 아닐까. <단순한 열정> 역시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에서 비켜난 세계에서 열정을 살았던 시간의 증언일 것이다.

원작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소설 속 문장들이 영화 속 대사뿐만이 아니라 사물과 빛, 표정과 음악으로 표현되는 장면을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능적인 기다림과 불안을 야기하는 기다림을 표현한 레티티아 도슈의 연기가 놀라웠다. 어쩌면 한동안은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그녀의 표정과 몸짓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알고 봅시다

1992년, <단순한 열정>이 출간된 직후 아니 에르노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만남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닙니다… 수치심도 죄책감도 없이 제가 겪었던 일 그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저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정확한 방식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가능한 한 어떤 수식도 없이요… 열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열정은 당연히 기다림에 있습니다.” 2022년, <단순한 열정>이 개봉한 직후, 다니엘 아르비드는 한 인터뷰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랑의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섹스가 사랑과 열정이 되었다가 다시 그리움이 되고 기다림이 되었다가 집착이 되고, 중독되는 모든 과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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