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풍경과 실존의 몽타주: ‘화이트 노이즈’ 소설과 영화 나란히 보기
2023-02-02
글 : 김예솔비
<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물이다. 영화는 3부로 나뉜 소설의 구성을 동일하게 취하고 있으며, 굵직한 사건과 장면 묘사뿐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 상당 부분을 원작으로부터 가져왔다. 그러나 높은 모사율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노이즈>의 각색은 여전히 소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드릴로의 소설은 영화로 옮기기에 까다로운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크게 두개의 층위로 나눌 수 있다. 백색소음처럼 무의미한 정보와 소비주의 시스템이 현실을 대체해버린 미국 중소 도시의 풍경과, 그 풍경 너머에 잠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실존적 고민. 전자가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현상을 분석하는 문화 비평의 자리를 요한다면, 후자는 인물을 향한 심리적 공감과 이입이라는 드라마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화이트 노이즈>의 각색이 직면한 문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풍경과 실존을, 비평과 드라마를 몽타주할 수 있을까?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가 소설과 극명한 노선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오프닝 장면이다. 소설은 개강을 맞아 기숙사를 방문한 스테이션왜건의 행렬을 지켜보는 잭(애덤 드라이버)의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영화는 소설의 3부에 언급되는 머레이(돈 치들)의 자동차 충돌 세미나를 먼저 보여준다. 머레이는 미국의 B급영화에 등장하는 충돌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거기서 폭력이 아닌 “미국식 낙관주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자동차 충돌은 항상 이전보다 향상된 영화의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충돌의 현장은 진보라는 전통적 가치와 믿음을 재확인하는 축제의 장인 셈이다. 자칫 폭력의 스펙터클을 즐기자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어딘가 찝찝한 머레이의 말은 영상이 보여주고 있는 폭력이 언제든 테크놀로지의 신화로 대체될 수 있는 가상임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현실을 가상화하는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암시하고 있는 대로 영화 <화이트 노이즈>가 그리는 80년대 미국 중소 도시의 풍경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핑센터, 재난 시뮬레이션과 같이 가상화된 현실이 실제를 압도하고 있다.

한편 머레이의 강연은 이후 영화에서 펼쳐지는 일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유해 물질을 실은 화물 기차가 트럭과 충돌해 죽음처럼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 광경은 앞서 머레이가 보여준 충돌 장면들과 겹쳐 보인다. 사람들은 이 인재(人災)를 가상과 합성된 재난으로 받아들인다. 유독가스 유출 사건을 시뮬레이션을 위한 모델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나 재난의 스펙터클 앞에서 들뜬 잭의 아이들의 흥분 상태를 보자. <화이트 노이즈>의 오프닝은 영화를 매개로 재난을 가상화하면서 희망을 날조하는 시대의 풍경을 예비한다.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잭은 자신의 방에서 수상한 사람의 실루엣을 본다. 잭 앞에 의미심장하게 나타나는 묘령의 인물은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물론 영화의 끝에 가면 이 남자가 바벳(그레타 거윅)이 먹는 알약의 음모에 얽힌 ‘미스터 그레이’였음이 드러나지만, 그전까지 영화는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를 유보하면서 섬뜩한 미스터리로 남긴다. 남자는 잭이 가진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공포가 형상화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독가스 유출 사건 이후 잭은 유독 물질에 노출되었다는 선고를 받고 죽음과 밀착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사고 이전부터 잭에게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따라다녔다. 대학에서 히틀러 학과의 학과장을 맡고 있는 잭을 두고 소설 속 머레이는 “어떤 사람들은 삶보다 더 크죠. 히틀러는 죽음보다 더 크고요. 그(히틀러)가 선생님(잭)을 보호하리라고 생각하셨겠죠”라고 말한다. 머레이는 백색소음처럼 잭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죽음의 공포를 보았고, 잭이 자신의 공포를 히틀러의 존재로 위장하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히틀러와 잭을 겹쳐놓으려 한다. 잭이 강연하는 장면에서 히틀러의 얼굴을 상영하는 영사기의 빛은 정확하게 잭의 얼굴 윤곽 위로 떨어진다. 소설에 없는 영화만의 표현 양식이다.

소설 <화이트 노이즈> 표지.

<화이트 노이즈> 전체를 가족의 이야기로 좁히자면 바벳이 복용하는 약의 정체를 잭이 추궁하고 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여정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다.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약물전달체계인 다일라는 죽음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약이다. 바벳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극심했기에 임상실험 대상으로 선발되었고, 주요 책임자였던 그레이와 성적 거래를 통해 다일라를 얻는다. 진상을 알게 된 잭은 그레이를 살해할 계획을 갖고 모텔을 찾아간다. 소설에서는 사건과 수습을 모두 잭 혼자서 감내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레이가 잭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잭의 뒤편에서 갑자기 바벳이 나타난다. 두 사람은 함께 위기를 수습하고 나란히 피를 흘리면서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한다. 영화가 개인의 실존보다 가족 드라마에 무게를 실은 선택의 결과물이다.

한편 <화이트 노이즈>의 소설과 영화 모두 마지막 종착지는 슈퍼마켓이다. 슈퍼마켓은 전의식적 쾌락에 둘러싸여 상처받은 자본주의의 영혼을 회복하는 곳이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슈퍼마켓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예고 없이 진열대가 바뀐 것이다. 사람들은 낯선 진열대 앞에서 방향과 위치 감각을 상실한 채 물건들 사이를 헤맨다. 한편 영화는 소설처럼 신자유주의의 징후를 암시하는 대신 슈퍼마켓의 한가운데로 돌아가 죽음을 잊을 것을 종용하는 허무주의적 엔딩으로 도달한다. 정해진 안무를 반복하며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과장된 몸짓 속에서 극대화된 가상성에는 실존의 주름이란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이 쓰인 80년대 레이건 집권 시기와 작금의 포스트 팬데믹 시기는 급격히 보수화된 사회와 각종 음모론으로 진통을 겪는다는 점에서 꽤나 닮아 있다. 그러나 시대정신이 전파되는 매체의 종류와 성질에서 비가역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80년대와 작금의 미국을 겹치는 바움백의 몽타주는 희미한 백색소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고 봅시다

잭은 꿈에서 깨어나면서 “파나소닉”(panasonic)이라고 읊조리는 바벳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교롭게도 이때 보이는 것은 파나소닉의 로고가 박힌 전자시계다. 일본 전자회사의 이름이자 초국가적 상표인 파나소닉은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여기서는 ‘공포(panic)의 소리’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단어에 의미심장한 순간을 부여하는 것은 <화이트 노이즈> 전체의 미학과도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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