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리 와버렸다. 2008년 아이언맨의 커밍아웃과 함께 시작된 MCU도 어느덧 5400일이 훌쩍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니 15년 동안 MCU의 세계도 몇 차례 부침과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의 방향타가 크게 꺾일 때마다 MCU는 ‘페이즈’라는 이름표를 붙여 정리해왔다. 바꿔 말해 그런 목록 정리라도 없으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MCU는 방대하고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좋았다. 좋을 수 있었던 건 돌발행동이었기 때문이다. MCU는 처음부터 디자인된 세계가 아니다. (물론 코믹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지만) 개별 히어로의 개성을 유지한 채 세계를 잇는 작업은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했다. <아이언맨>은 맏형으로 중심을 잡고, <캡틴 아메리카>는 첩보 액션 장르로 애크러배틱 액션의 매력을, <토르>는 웅장한 힘과 판타지스러운 전개를 선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무대에 섰을 때 기존 영화에서 접하기 힘든 방대한 연결과 조밀한 구성이 완성된다. 페이즈1은 그렇게 탄생했다.
사실 페이즈1까지가 깔끔한 마무리였을 것이다. 이후 페이즈2로 접어들면서 이제 영화의 성격 자체가 변했다. 사실상 메인 빌런 타노스를 중심으로 각 페이즈가 한편의 영화처럼 가능한 것이다. 이후엔 개별 히어로영화를 넘버링하지 않고 대신 부제를 붙이기 시작했다. ‘토르2’는 없어지고 <토르: 다크 월드>가 되었을 때 넘버링된 페이즈는 이제 <어벤져스>라는 한편의 영화가 된다. 아마도 <아이언맨3>가 개봉하고 나서야 이걸 깨달았던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MCU는 정교한 디자인이라기보단 우발적으로 파생된 우주다. 물론 그래서 더 생동감 있고 흥미진진했던 것도 사실이다. 옆동네 DC에서 계속 갈아엎는 유니버스와 달리.
페이즈3, 그러니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둘은 사실상 한 영화의 1, 2부다)까지는 잘 마무리되었다. <어벤져스>1편에 쿠키 영상으로 등장한 타노스를 말이 되게 회수한, 장대한 피날레라고 해도 좋겠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1기 어벤져스들이 타노스와 함께 퇴장하고 이제 다음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선대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어벤져스를 잇는 다음 세대가 나와야 하는 건 이야기의 욕망이 아니다. 프랜차이즈의 욕망이다. 이렇게 잘 구축된 세계관을, 아니 돈밭을 누가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균열과 불협화음은 그렇게 시작된다. 차라리 단절하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편이 속 편할 수도 있지만 거대해져버린 MCU는 선대의 유산이라는 저주에 걸린다. 세계관은 이어받되 더 넓어진 상상력으로 새롭게 세팅하고 새로운 영웅도 소개해야 한다. 페이즈4는 그 질척임의 결과물이다.
이제 히어로영화에 지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케빈 파이기는 한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히어로영화의 피로감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마블에서의 2년차부터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이게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코믹스 원작 영화의 유행은 언제 끝날까. 나는 그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내게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얼마나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MCU의 사령탑은 마블 코믹스의 방대한 원천 콘텐츠를 여전히 믿고 있다. 페이즈4가 다소 산만하고 복잡해진 건 사실이다. 문제는 개별 이야기의 매력이 없어진 게 아니다. 중심을 잡아줄 존재가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등장하는 메인 빌런 캉은 원작 캐릭터의 매력이나 존재감 측면에서 타노스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 마블 스튜디오는 캉을 메인 빌런으로 하여 페이즈6까지 이미 구상을 마쳤다. 2010년대 타노스와 함께한 챕터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2022)와 함께 비로소 진정한 마침표를 찍었다. 어쩌면 2020년대 MCU의 본격적인 시작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