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상황이나 관계 설명 없이 대화를 펼쳐낸다. 관객은 말의 뉘앙스, 리액션에 집중해 상황을 추리해나가는데 배우들도 그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않은 채 연기했다고 들었다.
박종환 느슨하게나마 장면을 시간 순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승진의 경우 대사에서 인물의 태도가 여실히 느껴져서 시나리오상에서 느껴지는 대로 연기했다. 롱테이크라 대사를 충분히 암기해야 하고 상황을 잘 전달해야 하는 나름의 미션이 있었지만 승진의 태도에 홀딱 빠져서(웃음) 너무 즐기느라 어렵다고 느낄 새가 없었다.
조은지 은영이 승진과 함께 있는 장면은 대부분 과거고 친구들과 모여 대화할 때 비로소 자신의 현재 심경을 이야기한다. 나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감정을 잘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연기하다가 “이래서 우리는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을 때마다 감독님이 명확하게 얘기해주진 않았다. 감독님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고.
- 그런 상황에서 감독님이 신마다 10번 넘게 다시 촬영했다고. 이런 불분명한 상황에서 어떻게 감독님을 신뢰할 수 있었나. (웃음)
조은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김덕중 감독님이 시나리오 행간에 선명한 그림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다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말을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감정이나 뉘앙스의 디테일을 잡아줬고 그때 나에게 어떤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아, 이걸 이야기한 건가?’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박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신뢰했다. 감독님은 등장인물 6명의 대사를 혼자 쓸 만큼 대단히 섬세한 사람이다. 시나리오나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님이 영화에 가진 애정을 충분히 느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배우나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다. <컨버세이션>은 사람을 향한 애정에 영화에 관한 애정이 버무려져 나온 영화다.
- 롱테이크 촬영 방식이 배우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을 텐데.
조은지 처음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한 회차 먼저 찍은 종환 배우에게 “될까?” 물었더니 “되더라고요” 하더라. 대사를 달달달 외우며 첫 촬영할 때도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신을 거듭할수록 연기하는 재미가 생기더라. 기회가 있다면 롱테이크 작업에 또 참여하고 싶다.
박종환 나도 또 하고 싶다. 감독님이 ‘액션!’을 외치고부터 시간이 길잖나. 숙제처럼 할 일을 수행하다보면 어느새 자의식이 없어진다.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없어지는 경험은 흔치 않은데 그러고 나면 스스로 연기를 잘했다, 못했다는 판단 자체에서 벗어나는 지경이 된다. 그냥 즐기는 거다.
조은지 나는 자의식보다 타의식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던데. 연기할 때 감정과 상황에 집중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시선이 가잖나. 앞에 놓인 카메라나 스탭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번에 촬영할 때는 어느 순간 그런 의식이 사라지고 내가 여기서 놀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 많은 말들이 나오는 영화다. 문득 두 배우가 오래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의 말이 있는지 궁금하다.
박종환 어떤 어르신이 “삼천포로 빠진다, 그 말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했더니 “그 말 내가 만들었다” 하시더라. 그런 줄 알았는데 잠시 후에 “뻥이다. 그런데 그런 말 하나 정도는 남기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도 큰 의미는 없지만 사람들이 ‘대체 누가 지은 말일까’ 궁금해하는 말을 남기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조은지 종환 배우가 그런 말을 남기려고 정말 부단히 노력한다. 술자리에서도 종환 배우가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 딱 기억나는 말은 없지만.
박종환 뭔가 오래 회자될 만하면 계속 밀어봤을 텐데 아직 그런 말을 못 찾았다.
- <컨버세이션>의 여러 대화 속에 감춰진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라고 느꼈다. 두 사람은 삶 속에서 이 질문의 답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나. 배우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박종환 이제껏 내가 해온 작품들이 내가 흔들릴 때마다 잡아준다. 내 나름대로는 작품마다 연결점이 있다. 어떤 캐릭터의 훗날의 모습을 다른 작품에서 이어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고 어떤 역할은 승진처럼 너무 간직하고 싶어서 체화한다. 작업하는 순간순간이 내 삶에 영향을 준다. 가끔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다른 역할로 도망갈 때도 있다. 그렇게 의미를 찾아가면서 작업해온 것들이 나에겐 힘이 된다. 계속 해나가려면 나의 감각을 잘 유지해야 하고 약간의 체력도 필요하다. 그래서 작품과 작품 사이에는 운동을 한다. 이런 것들이 당연한 불안과 어려움을 상쇄시킨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꾸준히 전달받아서 계속 할 수 있었다. 사실 이젠 잘 안 들어오는데(웃음) 계속 독립영화 시나리오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조은지 나는 좀 거창하다. 예전에는 생계 유지를 위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욕심이 생기더라. 배우라는 업에 정해진 고지가 없잖나. 먼 훗날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될 수 있는 작품 하나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배우로서의 고지가 아닐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 생각이 나를 설레게 하고 현재를 붙들어준다.
박종환 나도 비슷한 바람이 있다! 나는 주로 독립영화를 해왔는데 그 영화들이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에게 와닿는 부분을 발견하면 재미있을 거고 그렇지 않으면 재미를 못 느끼고, 작품의 호불호가 갈릴 거다. 배우 생활이 끝날 즈음, 내가 촬영한 작품들을 쭉 나열했을 때 관객이 ‘난 이 작품이 좋다’고 꼽는 작품이 많았으면 좋겠다. 어느 한 작품으로 꼽히는 게 아니라 관객의 마음에 여러 작품이 나뉘어 있었으면 좋겠다.
- <컨버세이션>의 흥행 외에 요즘 가장 마음을 쏟는 일은 뭔가.
박종환 조은지 배우와 <컨버세이션> 홍보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헤어질 결심>의 주연배우들이 홍보하고 다닐 때, 박해일 선배가 근사하게 배려하며 탕웨이 배우를 빛내주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나도 홍보 다닐 때 그런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오늘도 그 생각을 가지고 오긴 했거든? (좌중 웃음)
조은지 그런데 리드를 당했네. 바꾸자. 내가 박해일 선배 할게.
박종환 이게 마음대로 안돼. 그런데 진짜 그 생각을 했다.
조은지 고마워. 기대할게. (웃음) 나는 요즘 여러 가지 감정으로 채워져 있다. 부담감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고.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다. 요즘은 나를 자연스럽게 비워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잘 비워내고 새로운 걸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