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없는 묵직한 장르물을 향한 갈증
시종일관 숨 막히는 전개는 조금씩 드러내는 단서로 이뤄진다. 2화 마지막에서 이동식이 손가락을 늘어놓으며 급작스러운 전개를 더하기도 하면서, ‘진실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의 완급 조절이 탁월하다. 이 모든 상황의 연출자는 엄밀한 계산자다. 김수진 작가는 2007년과 2014년 각각 MBC 극본 공모(<사신이 산다>)와 SBS 극본 공모(<셰프의 레시피>) 등 두 차례 당선됐다. 2008년 MBC 시즌제 드라마 <비포&애프터 성형외과〉 〈라이프 특별조사팀〉에 참여했다. 보험사기꾼을 다룬 <매드독>이 2017년 방송됐다. 같은 해 타임슬립 로맨스물 <마이 온리 러브송>도 넷플릭스 시리즈로 공개됐다. 김수진 작가는 얼굴 외에 신상을 공개한 적이 없으며, 전자우편 인터뷰 역시 2021년 <미스테리아>와 한 것이 유일하다. 2월 말과 3월 초에 걸쳐 전자우편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 <매드독> 보험조사원, <괴물> 형사 등 장르물을 써왔다. 그런데 첫 단독 대본작은 <마이 온리 러브송>이더라.
= 저는 매우 긴 시간 동안 휴먼, 로맨스를 써왔습니다. 극본 공모 당선작 두편도 그렇고요. 꽤 오래도록 장르물을 읽거나 시청하는 건 좋아했지만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요. <매드독>도 처음 함께 시작한 SBS 오충환 감독이 제안한 아이템입니다. 그전엔 전쟁물 같은 것도 썼고요. 데뷔하지 못한 생계형 신인 작가 대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제 안에서 그림이 그려지면 감사히 받아서 작업해왔던 거죠. 아직도 솔직히 제가 본격 장르물을 쓰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괴물>은 꽤 긴 시간 품고 있던 이야기였는데 판타지가 없는 현실 베이스의 묵직한 장르물에 대한 갈증이 제 안에 있었고, 취재도 무척 재미있던 데다 ‘성인 실종’이라는 소재를 알게 된 순간 무조건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잡다하게 좋아하는 편이라, 집필 당시의 갈증과 관심 가는 소재에 맞춰 이야기를 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괴물>에선 이동식도 동생(혹은 동생의 주검)을 찾지만, 안양정육점 유재이(최성은) 역시 어머니를 찾아서 실종자 주검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전국을 찾아간다. 마지막 부분에 성인 실종자 신고를 당부하는 주연배우의 음성도 넣었던데.
=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는 원래, 실제 성인 실종자를 찾는 전단을 여러 장 붙여서 내보내고 싶었어요. 기다리는 가족 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그런데 제작진이, 방송분이 해외에 나갈 수도 있고 복잡해질 수 있다고 해서, 주연배우 두분의 음성으로 목격 신고해주시길 부탁드리게 된 겁니다. <괴물>에선 주인공 중 한 사람을 과거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설정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은 살인사건 검거율이 굉장히 높아서 주검이 발견되면 대부분 검거 뒤 처벌되니, 설정을 위해서는 주검이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 필요했죠. 대한민국에서 성인 실종자는 법적으로 가출인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고요. 그렇지만 ‘주제’에 천착해 드라마의 재미를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주인공들의 사연에 녹여넣으려 노력했습니다. 드라마는 결국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주제라도 재미없으면 봐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괴물>을 작업하면서 김수진 작가는 ‘엑셀표 지옥’에 빠졌다. 방과 작업실에 모두 비슷한 엑셀표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붙어 있다. 대본이 수정되면 엑셀표 역시 수정된다.
배우 여진구가 “한주원의 이력서”라고 말한 노트
<괴물> 드라마 대본집 세트에는 드라마 대본보다 판형이 크고 두꺼운 책이 한권 더 있다. ‘시크릿 작가 노트’로 등장인물의 이력서와 소개서가 등장한다. ‘소개’에는 그의 과거 이력과 상처의 근원,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감정까지 들어 있다. 한주원과 유재이 등의 로맨스에 대한 암시가 있어 ‘팬서비스’로는 그만이다. 조연출이 명명하기로는 ‘삶 시리즈’다. 배우 여진구가 “한주원의 이력서”를 받았다고 해, 존재가 알려지기도 했다. 책에는 감정의뢰서, 감정서, 참고인 진술조서, 부검감정의뢰서, 부검감정서, 수사과정 확인서, 수사보고서까지 포함됐다. 박정제(최대훈) 진술서 등의 몇개는 적힌 대로 대사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보통 손에서 흔들리는 실루엣으로만 잡히는 문서들이다. 이렇게 ‘한 세계’가 저기에 있었다. 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취재다. 공신력 있는 서적과 논문으로 자료 조사를 시작해 일반적인 조사부터 세세한 조사까지 나아갔다.
“대개 모든 분야가 세부적으로 나뉘는데, 저는 가리지 않고 찾아뵙는 편입니다. <괴물>은 주인공이 경찰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경찰청 대변인실에 부탁드렸고요. 그 뒤 실종, 살인과 관련된 여성청소년계나 강력계를 중심으로 뵈었고요. 지역마다 사건 발생 현황과 민원인의 성향이 다르니까 서울권, 경기권으로 확장했다가 제주도로 기획회의 갔을 때 여성 강력계 형사로 유명한 과장님 뵈러 서귀포에 갔죠. 또 등장인물들이 파출소에서 일하기 때문에 ‘만양’의 실제 배경이 됐던 지역의 파출소에 부탁드려서 만나뵈었고요. 저는 호기심이 많고,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하나가 궁금해지는 성격이라 계속 더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강경찰대, 관광경찰대, 경찰 인재개발원도 갔고요. 지하철경찰대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매우 아쉽습니다. 극중에 지역 개발 비리가 나오기 때문에 개발사업하는 분도 인터뷰했고, 성인 실종법을 발의하는 보좌관을 뵈러 국회도 갈 수 있었고요. 실종자협회에는 고민 끝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 방문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거나 혹은 작은 기대감을 줄 수 있겠다 싶어서요. 인터뷰를 반복하다보니 자료 조사를 충분히 하고 질문하면 처음엔 심드렁하다가도 어느새 열정적으로 답해주시더라고요. 6시간 이상 해준 분들도 계셨어요. 되도록 한번에 답을 주실 수 있도록 극중 상황을 말씀드리고 세세하게 질문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