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자던 제작사 본부장도 대본 읽고 흥분
드라마에는 내재된 ‘시간의 제약’이 존재한다. 시청자는 드라마의 시간 흐름대로 보게 된다. 작가는 그것을 자르고 저며내어 시청자가 보는 것을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2화 말의 이동식이 슈퍼 앞에 손가락을 놓는 장면(20년 전의 살인사건과 같은 양상)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중요한 장면이다.
“동식이 손가락을 슈퍼 앞에 놓은 건, 드라마적 장치로만 쓰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20년 동안 묻혔던 사건을 현재로 꺼내놓는 단초라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양’이라는 동네를 너무나 잘 아는 동식이라면, 외지인인 한주원의 등장을 이용해서 사건을 물 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한 선택이었고, 당시의 동식으로선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2화 엔딩에서 손가락을 올려놓는 장면을 통해 시청자의 흥미가 유발되기 바랐던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것만을 위해 장치를 설정하면서 집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회차에서 보면 진실이 아닌데, 엔딩의 흥미 유발을 위해 시청자를 이른바 ‘낚는’ 드라마적 장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저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가위의 여러 형태를 사랑한다. 선물은 거절하는 편인데 가위는 무조건 받는다. <매드독>에 출연한 최원영 배우가 선물한 가위·자 세트.
특징 없는 것보단 주제의식을 밀어붙이는 게 낫다
- <괴물>을 보면 이런 드라마가 살아남은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앞의 내용을 모르면 뒤의 내용을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주위의 지지와 시대적 흐름 등이 작용했을 법한데 어떤가.
= 당시 제작사가 저와 로맨스물을 하고 싶어 계약한 거라 반대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템을 이야기했을 때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괴물>이 편성될지 안될지는 제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일단 쓰기 시작했고요. 드라마 작업은 방영까지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방영될 때 대중이 무엇을 원할지, 어떤 드라마가 대세가 될지도 알 수가 없거든요. 중간에 제작사 본부장님이 찾아와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괴물>은 대본 4화가 나온 뒤부터 지지자가 하나둘 늘어나, 그만하자던 제작사 본부장님까지도 좋아하기 시작해 6화 대본이 나왔을 때 단번에 읽고 달려와서 마구 흥분해줬어요. 이 작업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설득은, 그냥 쓰는 거, 의견을 듣고 다시 쓰는 거, 그 과정을 무한 반복해서는,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야금야금 만드는 거 말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 ‘복잡하다’는 방송에서의 우려가 OTT에서는 장점이 됐다. 드라마 작가로서 이 상황을 보기에 어떤가.
= <괴물>은 도움을 받았죠. 그런데 OTT에서 전 회차가 스트리밍되는 드라마를 쓴다면 어떨까 생각해보면요, 매 회차를 따라간다는 건 긴 시간을 붙잡아야 하는 거니까 예전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고민은 있습니다. 초반부터 속도감 있게 전개해야 하나, 구성을 다르게 해야 하나, 캐릭터를 더 강렬하게 보여줘야 하나, 같은 고민이요. 이 산업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 변화하고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요.
- 대본을 넘어서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 <매드독>의 주현기(최원영)는 점점 분량이 늘어났는데 그건 정말 ‘신’처럼 연기하셨기 때문에 제가 더 써버리고 말았거든요. 사실 <매드독> 대본을 받고서 좀 힘들었다고 하셨어요. 서재 문을 닫고 들어가 한참을 못 나왔고,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고요. 하지만 고민의 결과 대본에 없는 동선과 액션은 하지만 대사는 조사 하나도 바꾸지 않았어요. 이유를 여쭈었더니 작가가 얼마나 고심해서 썼겠냐고, 조사 하나 바꾸지 않고도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그렇게 구현하는 게 배우의 일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배우님마다 발성이나 발음의 특징이 있을 수 있으니까, 대본 리딩 뒤 그에 맞춰 수정하는 편입니다. (여진구 배우가) 한주원 대사의 대부분을 존댓말로 처리해서 읽었어요. ‘…세요’ 같은 문장으로 대사를 써둔 것이 있었는데 ‘…니다’로 바꿔서 읽은 거죠. 제가 대본에 쓴 주원보다 좀더 경직되고 거리감이 있는 사람으로 해석한 것 같았고, 그게 매우 좋았어요. 그래서 수정했더니 한주원은 제가 처음 대본에 쓴 것보다 날이 서 있고 이성적인 인물이 됐죠.
▼작가의 작업 책상에 붙어 있던 메모들. ‘잘 쓰려고 하면 영점 조준이 잘못된 것이다…’는 좋아하는 박해영 작가의 말이다. ‘시체를 안겨주어야 한다’는 드라마 대본 작업을 하면서 잊지 않기 위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욕심내는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붙여놓은 메모들이다.